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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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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름다운교회 Dec 27.2020 저무는 2020년을 바라보며…
    2020년의 마지막 주일을 맞이하고 있습니다. 당황과 혼돈, 가치관의 혼란과 New normal을 향한 새로운 변화로 인하여 사회와 교회 모두가 깊은 혼란에 빠진채 한 해를 정리해야 하는 이 아쉬움과 함께 한 해의 마지막 시간을 맞이하게 됩니다. 지금보다 더 큰 염려와 미래에 대한 불안한 소식들이 우리 주변을 밝히고 있지만, 지금까지 함께 해 오셨던 주님이 오는 한 해에도 그분만의 독특한 방법으로 우리의 길을 인도해 주실 것을 믿습니다.지난 한 해를 돌아 보건데, 코로나 시기임에도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에게 붙어있기 위한 몸부림을 다 했던 한 해이기도 하였습니다. 모여서 함께 할 수는 없었지만, 성경읽기, 시편묵상, 큐티활동, 성탄묵상 그리고 가능한 모든 수단을 동원하여 모이기를 힘써서 주일 예배와 새벽기도회 그리고 다니엘 특.새등은 우리가 우리 구주 예수님께 붙어 있기 위한 몸부림이었다고 생각합니다. 행여 우리 성도들이 이 코로나에 침잠되어 뒤로 물러가 침륜에 빠지지는 않을까 염려함이 많았기에 어떻게 해서든 우리가 말씀과 기도로 신앙생명을 유지해 보려고 할 수 있는 모든 노력을 다해 본 것 같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이들은 목사님이 너무 많은 일을 만들어 지치게 한다고 하는 분들도 있지만 누군가는 그 힘으로 위로와 은혜를 누리며 살았기에 그것을 마음에 둘 여유가 없습니다. 그러한 일들은 목사의 성격이나 치적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 성도 한분 한분이 주님께 향한 그 마음을 느슨하게 하지 않게 하기 위한 장치임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많은 분들이 그것에 따르며 나름대로 주님 앞에 서려는 열심도 보이고 있다는 것이 제게는 큰 힘이 됩니다. 함께 예배하고, 함께 묵상하고, 함께 기도하고, 함께 울고 웃으며 우리의 신앙 걸음을 함께 하는 분들로 인하여 교회는 오늘도 생명을 유지하고 살아감을 느낍니다. 그러한 분들이 있기에 감사함으로 또 한 해를 이렇게 마무리 할 수 있게 된 것이지요. 어떤 젊은 집사님 내외는 교회를 사랑하는 마음이 들어서 이 어려운 시기에 교회는 얼마나 힘들까 걱정하며 미루어 놓은 십일조를 모아서 드리며 교회에 대한 애정을 표시하는 분들도 있었습니다. 내가 받은 은혜는 내가 드리는 것보다 너무 커서 감당할 수가 없다고 하면서 온 마음으로 하나님께 드리는 분들이 있었기에 그렇게 어렵다는 시기를 우리는 은혜로 건널 수 있게 되었습니다. 정말 하나님의 은혜요, 그 은혜에 붙들린 성도님들의 헌신이었습니다. 이 어려운 시기에 더 풍성한 재정과 교회의 성장을 맛보고 있다는 어느 목사님의 고백을 들으며 역시 하나님에게는 불가능이 없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일하는 자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이지 싶습니다. 내년도에는 어떠한 일이 기다리고 있을지 아무도 가보지 않은 길이기에 많은 염려와 두려움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길을 사도 바울처럼 ‘내 생명을 아끼지 아니하는’ 마음으로 믿음의 길을 또 내 디뎌야 합니다. 예수님의 아버지 요셉은 꿈에 하나님의 지시를 받고, 그것을 그냥 꿈 혹은 개꿈으로 여겨, ‘어? 이상한 꿈도 다있네?’ 그러면서 무시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을 하나님의 음성으로 받아 그대로 실천해 갔습니다. 오늘 우리는 이보다 더 확실한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삽니다. 그 믿음으로 또 다시 오는 한 해를 잘 준비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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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름다운교회 Dec 20.2020 Merry Christmas!
    예수님의 생일에 예수님은 없고, 축하객만 있더라! 어떤 귀인이 생일을 맞이해서 사람들을 초청했습니다. 많은 사람이 잔치에 와서 선물을 주고 축하했습니다. 그런데 그 자리에는 유명 연예인이 오게 되었는데, 생일맞은 귀인에게 인사만하고 온통 관심과 대화의 중심은 그 유명 연예인이었습니다. 그날 그 잔치를 차린 주인은 어떤 마음이었을까요?우리 집에는 자그마한 성탄트리도 없습니다. 문밖에 반짝이는 불빛도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 동네에 들어서면 여기저기에 반짝이는 성탄트리들이 어두운 밤을 밝히는 집들이 삭막한 사막동네에 눈요기를 더하고 있습니다. 오가면서 생각해 봅니다. 가장 기뻐하고 축하해야 할 우리집에는 아무 축하도구도 없는데, 예수님을 모르는 저 집에는 무슨 일로 축하도구들이 넘치고 있는 것일까요? 두 가지 모순을 보는 것 같았습니다. 예수님의 탄생을 가장 기뻐해야 할 내 집에는 아무 것도 없고, 예수님의 탄생과는 전혀 관계없는 저 집에는 잔치가 벌어지는 이 해괴한 일은 도대체 어디서 오는 것일까요? 마치 생일의 주인공은 빠진 채, 잔치만 즐기는 사람들로 즐비한 세상이 오늘의 모습이 아닌가 싶어서 씁쓸해집니다. 성경은 정확하게 예언을 했습니다. 메시야가 올 것이고, 그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아버지라, 평강의 왕’(사9:6)이라 불리울 것입니다. 그러나 그분은 우리가 보기에 흠모할만한 것도 없게 보일 것이라(사53:2)고 하였습니다.코로나로 인해서 온 세상의 표준이 바뀌어진 이 시대에 더더욱 그렇습니다. New normal로 불리워지는 이 시대에 과연 예수님은 어디에 계실까 생각해 봅니다. 교회의 문이 닫혔고, 오가는 발 걸음도 뜸해졌습니다. 그러나 내년 여행객 모집에는 차고 넘칩니다. 스키장, 썰매장, 유흥장소에는 사람이 넘치지만, 교회는 점점 썰렁해져갑니다. 때로는 여기에 과연 예수님이 계실까 곱씹어보게 합니다. 가장 밝은 Spot light를 받으셔야할 주인공 예수님은 내 삶에서 어떤 light을 받게 계시는지 궁금합니다. 성탄절이라는 절기를 축하하는 시간이 아니라, 그 성탄의 분위기가 좋은 것이 아니라, 나같은 죄인을 위하여 이 땅에 ‘죄인의 옷’을 입고 오신 예수님이 좋아지고, 그 사랑과 은혜에 감격하고 감사하는 시간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영광스러운 성탄 찬송도 들리지 않고, 어린 아이들의 재롱섞인 연극도 없으며, 세상의 화려한 조명을 받지 못한다 할지라도, 지금 내 마음의 중심에는 여전히 ‘예수님’ 소리만 들어도 설레는 마음이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세상 모든 사람들이 예수님의 탄생과는 상관없이 저마다 각자의 삶을 즐기고 살아갈 때조차도, 동방의 박사들은 그들이 연구한 결과를 신뢰하며 그 멀고 먼 길을 걸어서 유대땅까지 찾고 찾아와 그 아기 예수께 가장 귀한 예물을 올리고 갔습니다. 천사들의 찬양과 예고를 그냥 신기한 것으로 흘려듣지 않고, ‘가보자!’는 결단으로 예수님을 찾아온 베들레헴의 목자들의 증언도 있었습니다. 코로나로 인해 우리의 시선을 빼아사 갈지라도 우리는 예수님의 사랑을 한발자국 더 가까이 느낄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세상은 점점 자기중심으로 사는 것을 가르칠 때에라도, 예수님을 믿는 우리들의 마음만큼은 자기 자리를 예수님께 내어드리고 그분이 원하신 삶으로 함께 걸어갈 수 있으면 더더욱 좋겠습니다. 메리 크리스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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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름다운교회 Dec 13.2020 하이브리드 교회와 하이브리드 신앙 (Hybrid Church & Faith)
    다니엘은 기도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특별히 꿈을 통해서 하나님의 계시를 받았던 선지자였는데, 전문 목회자 출신의 사람이 아니면서, 고위급 관리라는 세상적 지위를 가지고 이방땅 바벨론에서 메대와 바사의 정권 교체기에도 믿음으로 살아낸 사람입니다. 요셉과 더불어서 성도가 세상에서 어떻게 믿음으로 살아낼 수 있는지에 대해 소중한 모델이 되기도 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아주 선명하게 깨달았던 선지자였던 다니엘도 자신이 받은 환상에 대해서 늘 하나님께 묻습니다. ‘이때가 언제입니까? 언제가 그 끝입니다?’ 참 답답한 일이었을 것입니다.코로나 상황이 지속되어 온지가 벌써 일년이 다가오는데, 이제는 처음보다 더 심각한 상황에 마주서고 있는 각종 지표가 온 세상을 술렁이게 하기에 충분합니다. 영국에서 백신이 개발되고 접종이 이루어진 이래, 미국에서도 FDA의 승인이 나서 얼마있지 않으면 일반 접종이 시작되려는 시점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날마다 신기록을 갈아치우듯 확진자가 쏟아지고 있어서 다니엘의 탄식처럼 ‘언제가 그 끝입니까’라는 물음을 요즘에 탄식처럼 뱉어야 할 시기인 것이 참으로 많이 닮았습니다. 흔히 요즘의 교회를 ‘하이브리드 교회’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지금까지는 대면예배, 교회에 나와서 드려야만 그것이 예배가 되는 것으로 여겼는데, 인터넷의 발달과 바이러스에 대한 두려움, 혹은 그것을 핑계삼아 게으름을 포장하려는 이유등으로 인해 교회에 나오려는 인원이 줄어들면서 이제는 비대면 예배, 인터넷으로 예배를 드리는 이 복합적인 기능을 가진 교회로 바뀌어지는 교회라 불러 ‘하이브리드 교회’라고 명명하는 것 같습니다. 하이브리드(Hybrid)란 혼용(混用), 복합적 기능을 하는 것의 용어입니다. 예를 들어 비행기와 헬리콥터의 양쪽 형태를 혼용하는 것과 같은 용어들이 이제는 교회관에도 영향을 미쳐서 이런 신조어가 생겨난 것입니다.이제 이것이 더 넘어가면 ‘하이브리드 신앙’이 대세를 이어가는 것은 어떨까 싶습니다. 이것도, 저것도 아닌, 편의성을 강조한 실용적인 신앙, 이것이 정말 가능한 시대일까요? 신앙에 있어서 정말 하이브리드가 가능하고, 만일 그것이 가능하다면 그것이 변질과 어떻게 구분할 수 있을까요? 자기 편의에 따라서 신앙생활이 달라진다면, 마지막 시대에 다니엘이 예언했던 것처럼, ‘지혜있는 사람들’(단11:32)이 몰락했던 것과 무슨 차이가 있을까요? 만일 하이브리드 신앙이 가능하다면 한편은 ‘성결한 신앙’에 다른 한쪽은 인간의 편의성을 중심한 ‘좀더 복잡하지 않고 편안하게 해주는 신앙생활’ 사이를 오가면서 ‘사람들이 빠르게 왕래하고, 지식(악)이 더해지는’ (단12:4) 이 세상에서 성도의 자리매김은 어디가 되어야 할까 생각해보면 오싹해지지 않을 수 없습니다.변화는 필요합니다. 그러나 그 건전한 변화를 넘어서 ‘변질’이 오면 그때는 겉잡을 수 없을만큼 배교와 배반과 편의에 기초한 하이브리드 신앙에서 시작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마지막 시대에 우리는 정말로 지혜를 구해야합니다. 무엇이 ‘참’이고, 무엇이 ‘거짓’인지를 분별해 내지 않고, 그저 세상이 주는 낚싯밥만 먹는다면 분명 우리도 초대 교회에 책망을 받았던, 사데, 라오디게아, 두아디라 교회의 모습과 다를 것이 없습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지혜를 주시기를 간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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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름다운교회 Dec 06.2020 내게 믿음은 어떻게 작용하나요?
    지난 주에 어느 집사님으로부터 전화 한통을 받았습니다. ‘목사님, 저 지금 병원에 입원해 있습니다. 코로나 양성으로 판명되었습니다. 기도해주세요’ 다급함도 없이 담담하고 평온한 어조로 말씀하셨습니다. 그 순간, 참 답답한 생각이 쏟아졌습니다. 교회 출석이 어려운 분이기에 교회에서 전파가 된 것은 아니었고, 지병 때문에 외출도 안하는 분인데 아마도 가족간의 감염으로 전파가 된 것으로 보이지만, 이 분은 코로나에 걸리면 안되는 중증의 기저질환이 있으신 분이기 때문에 참 많은 걱정이 되었습니다. 이것으로 어려움이 생기면 안되는데… 여러 생각이 들었고, 절대로 그 코로나가 집사님을 넘어뜨리지 못할 것이니 믿음으로 일어서자고 용기를 드리고 기도했습니다. 다음 날 새벽 기도회에 상황을 알리고 기도하는 분들과 함께 정말 진심으로 기도했습니다. 한번 더 기회를 주시라고… 그리고는 다음 날에 다시 그 집사님에게 전화를 받았습니다. 밝은 목소리였습니다. ‘목사님, 저 퇴원합니다. 기도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할렐루야! 아무 일없이 집으로 퇴원해도 된다고 해서 나간다면서 전화를 하신 것입니다. 무슨 생각이 들었을까요? 아니, 코로나 검사가 잘못되었던거야? 오류가 있었던거야? 이런 생각이 들었을까요, 아니면 ‘할렐루야! 우리의 기도를 받으신 하나님이 이렇게 기적을 보여주셔서 치료하시고 퇴원시키셨습니다!’ 이랬을까요? 사도행전 12장의 베드로 사도의 이야기가 생각이 났습니다. 베드로는 잡혀 투옥되었고, 교회는 베드로를 위하여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기적적으로 베드로가 풀려나왔지만 사람들은 믿지 못했습니다. 믿지 않고 무슨 기도를 했을까요? 마치 그 상황이 주마등처럼 제 뇌리를 스쳐지나갔습니다. 하나님이 고치실 것을 믿었다면 ‘거봐라, 하나님이 하셨다!’ 그럴 것인데, 마냥 신기하게 생각하는 나를 보게 된 것입니다. 가만히 생각해 보니 목사의 믿음보다는 그 집사님의 믿음이 너무나 실제적이고 위대해 보였습니다. 이유는 이것입니다. 그 분은 지금 자기의 이 기가 막힌 답답한 상황에서 기도가 필요하다는 것을 믿었기에 곧바로 목사에게 전화로 기도를 요청 했고, 자기가 이렇게 빨리 퇴원하게 된 것은 바로 기도의 힘이었다는 것을 믿었기에 기도해 줘서 감사하다고 전화를 했던 것입니다. 그분은 기도의 능력을 믿었던 것입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그리 생각할까요? 어떤 분은 코로나에서 회복되었어도 하나님의 은혜임을 고백하는 분이 있고, 어떤 분은 그렇지 못한 분도 있습니다. 어떤 것을 보아야 하는 것일까요?코로나 상황이 개선되는 것이 아니라, 점점 우리 곁으로 가까이 오고 있다는 긴박한 일들이 주변에서 일어나고 있습니다. 백신의 소식도 우리 곁에 있습니다만 우리가 믿어야 할 것은 백신이 아닙니다. 우리가 넘어야 할 그 무엇이 있다면 믿음으로 이겨야 합니다. 그 분 집사님의 일을 통해 저 스스로에게 물어봅니다. 과연 내게서 믿음이라는 시스템이 작동은 하고 있는가? 나는 이 시기, 이 상황에서 무엇을 믿고 있는가? 내 믿음은 살아서 작동하고 있는가? 아니면 쓰려고 해도 더 이상 쓸 수 없을정도로 노쇠해져 있는가? 우리가 정작 보아야 하는 것은 못보고, 보지 않아도 되는 것에 믿음을 쏟고 있는 것은 아닌가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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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름다운교회 Feb 24.2021 보고싶은 것만 보고싶은 유혹
    가끔 아내에게 물건 좀 가져다 달라고 심부름을 부탁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면 돌아오는 대답은 ‘없다’는 것입니다. ‘아니, 거기에 있어’ 그래도 아무리 봐도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답답한 제가 찾으러 갑니다. 그러면 거기에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분명 거기에 있는데 나는 보고 아내는 못보는 것일까요? 숙제입니다. 같은 물건을 두고서 누구는 보고, 누구는 못보는 현상이 거기에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 어디에나 있습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미국 그리고 우리의 마음의 고향 대한민국도 너무나 같은 면이 있습니다. 좌우, 진보와 보수가 그러합니다. 한 쪽은 다른 한 쪽이 전혀 안보이는 모양입니다. 오직 내 편만 진리이고 상대방은 뽑아내야할 적폐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게 민주주의냐는 생각이 저절로 나는 현실이 오늘 미국과 한국에서 일어나고 있습니다. 서로가 돌을 던집니다. 차이가 왜 이리도 큰지 모르겠습니다. 예를 들면 한국에서 부동산 정책으로 인해 나라가 들썩입니다. 부동산 가격이 왜 올라가냐고 물으면 정부의 잘못된 정책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면 한 쪽은 부자들이 사재기 해서 그런다고 합니다. 이러한 시각에는 서로가 보고 싶은 것만 보는 현상이 있기 때문이라고 저는 믿습니다. 정책을 결정하는 통계도 자기의 주장에 이로운 것들만 끌어다 씁니다. 자기의 주장을 합리화 해야하기 때문입니다. 각자가 자기의 ‘프레임’에 붙잡혀 있기 때문에 남의 소리가 안들립니다. 틀리다고 하는 사람도, 맞다고 하는 사람도 각자가 자기 프레임에 갇혀 있습니다.디모데에게 보내는 사도 바울의 편지속에 말세에 나타나는 현상중의 하나가 ‘자기의 귀를 가려줄 많은 스승을 두는 것’(딤후4:3)이라고 진단했습니다. 나를 비판하는 소리에는 귀를 닫고, 자기 주장에 힘을 실어줄 사람을 찾고 싶어하는 것이 인지상정일 것입니다. 회의를 해도 그렇습니다. 자기 주장을 옳다고 말하기 위해서 흔히 ‘다들 그렇게 말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다(all)’가 정말 모두는 아닙니다. 자기 주변의 몇 사람일 뿐일 때가 더 많습니다. 자기 합리화에 불과할 뿐입니다. 결국 인간은 자기가 보고 싶은 것을 보고자 하는 유혹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이 프레임의 덫에 걸리면 ‘나는 안보이고, 남만 보입니다’. 내 눈의 대들보는 안보이고 남의 눈의 티만 대들보처럼 보입니다. 무엇인가 가려져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런 사람은 ‘안약을 사서 발라야’합니다. 시각 보정 안경이라도 껴야 합니다. 우리는 지난 일년 가까이를 코로나라는 바이러스에 포로가 되어 살았습니다. 누가 옳은 말을 하는지도 모를 수많은 정보와 주장과 예측이 우리 주변에 일어납니다. 두려움의 커튼을 스스로 쳐 놓고, 도무지 그 안에서 나오려고 하지 않으려고도 합니다. 세중(世中)의 판단으로 생각한다면 우리 교회는 모여서는 안됩니다. 예배도 기도회도 해서는 안됩니다. 그냥 문닫고 조용히 있어야 합니다. 어떤 사람은 코로나로 인해서 죽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바이러스 때문이아니라 먹고 살 것이 없어져 죽습니다. 이러한 시대에서도 우리는 가야할 길을 걷지 않을 수 없습니다. 보고싶은 것만 봐서는 이 땅의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어진 사명을 이룰 수 없습니다. 죽기를 두려워해서 마귀의 종노릇 하는 사람들이 있다고 했습니다. 두려워도 교회의 사명, 선교와 예배, 꼭 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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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름다운교회 Feb 24.2021 어떻게 보답하리요
    교회가 개척되어 온 지난 12년을 되짚어 볼 때가 있습니다. 그리고 오늘이 있게 된 그 원동력은 어디에 있는지를 따져볼 때가 있습니다. 오늘 여기에 우리가 있게 된 그 힘은 어디에 있는지를 생각하면 온 몸에 소름끼칠 많은 일들이 생각이 납니다. 햇 수로 12년이고, 이 교회를 거쳐간 성도들의 숫자가 600명이 넘는데, 아직 이 교회에 남아 주의 교회를 이루고 있는 아름다운 교회가 존재하는 그 힘은 어디에서 나오는가 싶었는데, 이 세 가지가 마음에 잡힙니다. 하나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입니다. 이곳에도 수많은 교회들이 있지만 나름대로 역할을 감당하게 되는 것은 전적으로 우리의 능력이 아닌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이것이 가장 큰 힘이요 능력입니다. 둘째는 ‘기도의 힘’입니다. 우리 교회가 출발하면서 빼놓지 않고 잘 한 것이 하나있다면, 이 교회가 기도하는 교회가 되도록 힘썼다는 것에 있습니다. 일년에 3차례의 특.새 중, 특별히 가을에 하는 다니엘 세이레 특.새는 우리 교회를 지탱해가는 가장 큰 능력이 되었습니다. 만일 이 기도의 힘이 없었다면 우리 교회는 이미 공중분해되어도 벌쩌 되었을 것입니다. 셋째는 하나님과 교회를 사랑하는 분들의 깊은 헌신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목사의 열정과 사랑보다도 더 깊은 사랑으로 교회를 돌보는 분들의 헌신이 없었다면 오늘의 우리가 있을 수 없을 것입니다.이제 올 해의 다니엘 특.새를 어제로 마무리했습니다. 특별히 2020년도에 행해진 제12차 다니엘 특.새는 코로나 사태로 인해서 기도회 자체가 성립할 수 없는 조건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감염의 위험과 두려움이 있었고, 이러한 시대에 만일 확진자 한 사람이라도 생긴다면, 교회의 존폐까지 몰릴 위험이 있는 환경속에서 결정된 기도회였기에 목사로서는 정말로 중압감이 클 수밖에 없었습니다. 누구 말대로 ‘그냥 집에 머무르는 길이, 세상을 위하고 사랑하는 성도의 모습’이라는 말이 차라리 설득력이 있어 보였습니다. 너무나 무모한 도전이 아닐 수 없다는 염려로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이번 특.새 뿐만 아니라, 지난 3월부터 모든 교회가 문을 닫을 때에도 우리는 활짝 열어두었고, 주변의 염려와 비난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마음을 하나님이 아시고, 지난 1년 동안 그리고 이번 3주의 특별한 위험속에 진행된 특.새 기간동안 하나님은 안전하게 지켜주셨습니다. 그리고 주제처럼 ‘새 영, 새 마음, 새 은혜’를 허락해 주셨습니다. 할렐루야!뭐지? 이게 뭐지? 하는 마음으로 올 한 해가 다 가고 오늘 추수감사주일을 맞이합니다. 온통 우리를 두렵게 하는 일들이 시시각각 두더지처럼 올라왔습니다. 과연 우리가 믿는 자인지 의시하게 하는 환경도 많이 있었습니다. 이러한 상황은 마치 1620년 영국의 종교박해를 피해서 미국으로 건너온 청교도들 102명이 63일간의 항해를 마치고 미 동부 해안에 도착했는데, 그 해 겨울에 절반의 사람들이 죽으면서도 하나님께 드린 감사, 이것이 추수감사절이 되었던 것을 기억합니다. 우리의 모습이라고 여겨지는 대목입니다. 이 위험한 시대에 무엇으로 하나님께 감사하느냐고 되물을 수 없는 것은, 이보다 더 큰 사랑의 힘이 작용하기 때문입니다. 산 자의 감사이며, 견딘 자의 감사이고, 은혜받은 자의 감사입니다. 하나님의 은혜, 무엇으로 보답할 수 있을지요. 감사의 예배로 올려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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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름다운교회 Feb 24.2021 우리가 Focusing 해야 할 것은…
    지금 다니엘 특.새가 진행되고 있고, 이제 마지막 3주차를 향하여 달려갑니다. 어려운 시기에 이렇게 한다는 것이 어떤 의미가 있을지, 과연 이러한 집회를 해야하는지, 성도들이 과연 얼마나 참여하게 될지 등으로 여러 생각에 잠겼었는데 벌써 마지막 주를 맞게 됩니다. 어려운 시기임에도 불구하고 각자의 사명을 따라 잘 따라가고 있는 성도들의 모습을 보면서 아직도 우리 교회는 하나님께서 쓰실 것이라는 큰 희망과 기대를 갖게 하셨습니다. 참으로 감사한 일입니다. 시간마다 하나님께 떼를 쓰듯 기도하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의 눈에는 정말 어리석고 위험하게 보이는 이러한 집회가 하나님의 능력의 손으로 잡혀서 사람의 생각과 지혜를 부끄럽게 하시도록, 그래서 안전하고 기쁨과 감사 그리고 능력으로 이 집회가 이루어지기를 말이지요. 분명히 우리 아름다운 교회를 하나님께서 그냥 버려두지 아니하실 줄 믿습니다.하지만 저의 가슴을 짓누르는 것이 있습니다. 요즘 3차 펜더믹이라는 이야기가 나오면서입니다. 가을의 문턱을 넘어서 겨울에 접어드니 코로나가 점점 기승을 부려 각종 신기록을 갈아치우며 그 위험도를 높이고 있습니다. 백신이 나온다고 하는데 갈수록 위험성은 높아지면서 각 주마다 긴장감을 놓지 않고 있습니다. 다시 봉쇄가 이루어지는 것은 시간문제라는 소리도 들립니다. 우리 둘째 아이가 이번 추수감사 절기에 집에 오는 것도 만류를 해야 할 정도의 심각성이 있는 것 같습니다. California주를 비롯한 서부 3개 주에서는 여행등의 비필수적 필요에 의해 주간 경계를 넘지 않도록 하고, 넘을 시에는 2주간의 자가격리를 권고할 정도입니다. 엊그제에는 네바다 주지사도 코로나 확진을 받았다고 공고되었습니다. 권력자들인 대통령도, 주지사도 안전하지 않습니다. 병원, 식당, 상가, 관공서, 학교, 교회등 어디도 안전한 곳이 없습니다. 바라보면 볼수록 두려움이 전달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 모릅니다.이런 가운데 하나님께서 제 마음속에 한가지를 지적하셨습니다. 신문기사를 보고, 사람들의 두려움의 소리를 듣고, 방송이나 각종 SNS에서 듣는 소식은 정말로 나를 두렵게 하기에 충분한 것들이었습니다. 당장 내일이라도 지구가 망할 것 같은 두려움이 갑자기 엄습하는 것이 우리의 ‘마음’입니다. 왜 그럴까요? 자꾸만 그것을 보고 들으니까요. 매일 신문/방송에 나오는 확진자 숫자만 보고, 세고, 그것의 크기에 따라서 ‘마음’을 싣고 있으니 항상 두려운 것입니다. 결국 우리가 무엇을 보느냐입니다. 무엇을 듣느냐입니다. 사람들은 요즘 정말로 자기가 듣고 싶은 소리만 듣습니다. 다른 소리는 절대 들으려 하지 않습니다. 자기 생각에 공조해줄 ‘동조자’를 구합니다. 그래서 그 길로 갑니다. 지금 우리가 바라보고 듣고 집중해야 할 것은 세상 소식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우리가 바라보아야 할 곳은 세상이 아닙니다. 세상은 언제나 우리에게 혼란을 줄 뿐입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우리에게 소망을 주시고, 갈 길을 보여주십니다. 그분을 바라보고, 그분께 집중할 때에 우리는 세상의 두려움을 극복하며 나갈 수 있습니다. 보이는 것으로 마음을 움직이지 말고, 보이지는 않지만 주 예수 그리스도의 주실 은혜만 사모하면서 마지막까지 승리하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주께서 함께 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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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름다운교회 Feb 24.2021 얼마나 더 착해야 할까요?
    사람들은 가끔 인간이 선한 존재이고, 선하게 태어난다고 이야기하고 그렇게 믿습니다. 뭘 보면 아냐면, 태어날 때에 아기들을 보면 된다고 합니다. 그 천진난만한 아이들에게 무슨 악한 것이 있느냐는 것을 예로 들곤 합니다. 저도 그렇게 믿고 싶습니다. 그래서 그 어릴 때, 천진난만한 시절로 돌아가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 보면, 우리가 몰라도 너무 인간에 대해서 모릅니다. 아니 착각하고 있다고 표현하는 것이 맞을 것입니다. 자주 제가 이야기하는 것처럼, 갓난 아이들은 천사같지만, 그래서 그 모습이 너무나 천사같아서 악을 모를 존재같지만, 사실은 악을 표현할 수 있는 힘과 방법을 모르고 태어날 뿐입니다. 그런 아기들도 얼마나 악할 수 있는 지를 아는 것은 1년도 채 안 걸립니다. 가르쳐주지도 않았지만 자기 감정을 표현하기 시작하면서 때론 부모를 놀래키기도 합니다. 시기, 질투, 떼쓰기, 자기주장등이 점점 강해지면서 가르치지도 않은 거짓말까지 합니다. 언제 배웠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이미 그 안에 ‘악’이 함께 존재하고 있었습니다. 태어나서는 그것을 표현할 방법과 힘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 악이 점점 자라서 방법이 더 치밀해지고 더 나빠지는 것뿐입니다.며칠 전에 샘스에 물건 살 일이 있어서 갔습니다. 여러 가지 물건을 사는데, 손에 든 것이 많아서 좀 복잡했습니다. 저는 카운터에서 계산하지 않고 App으로 찍어서 결재를 하기 때문에 그냥 나오면 됩니다. 그날도 그렇게 전화기 속의 앱으로 계산을 하고, 정문의 검사하는 사람의 확인까지 받아서 차에까지 왔습니다. 물건을 하나 하나 차에 싣다가 깜짝 놀랐습니다. 맨 밑에 스캔하지 않은 물건이 두 개가 있었던 것입니다. 가격으로 보면 30여불 되는 물건입니다. 자, 이미 정문을 통과했고, 그냥 물건만 싣고 가면 누가 뭐라 하는 것도 아닙니다. 그냥 모른 채하고 집으로 오면 아무도 모릅니다. 잠시 그 물건을 차에 싣지 못하고 1분정도 생각하고 망설인 것 같습니다. 그냥 갈까? 에이, 아무도 모르는데… 아니야, 30불정도로 네 양심을 팔래? 이런 싸움을 잠깐 하고서 결론을 내렸습니다. 지금 우리가 다니엘 특.새를 하고 있는데, 제 양심에 이것을 그냥 넘기면 말씀 전하는 데에 큰 방해를 받을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그것들을 들고 정직하게 말했습니다. 이만저만 해서 그냥 나왔노라고, 다시 계산하겠다고. 마음이 시원해졌습니다. 그러면 저는 양심이 깨끗한 사람이 된 것인가요? 착한 일 하나 한 것일까요? 그래서 내 양심은 더럽힘에서 깨끗해졌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가끔 홈디포에 가서 물건을 살 때가 있습니다. 어떤 때는 10센트 정도 물건이 얹혀질 때도 있습니다. 그냥 몰라서이기도 했지만 어느 때는 못 하나를 그냥 들고 나올 때도 있었습니다. 그건 미미한 것이라서 양심을 팔아도 되는 것일까요? 이런 식으로 따지다가 보니, 정말 저는 선한 것이 하나도 없는 악한 존재임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착한 것 하나로 우리의 양심에 위로를 받아서는 소망이 없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밖에는 이 악한 존재가 구원받을 길이 없다는 것을 절실하게 깨닫게 됩니다. 특.새가 한 주 지나고, 두 번째 주를 향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힘으로는 선할 수 없음을 깨닫고 구원하시는 하나님께 감사하고, 그 분을 향한 십자가의 은혜를 붙들고 오늘도 걸어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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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39
    아름다운교회 Feb 24.2021 제12차 다니엘 특.새를 시작하며
    매년 이맘때에 다니엘 세 이레 특별 새벽기도회를 진행하고 있는데 벌써 아름다운 교회에서만 12년째, 그리고 제가 베가스 와서 시작한 사역이니 제법 오래된 사역중의 하나가 특별 새벽기도회입니다. 프로그램을 만들어 진행을 하기 때문에 때로는 억지로, 체면 때문에, 강요에 못이겨, 자발적으로, 사모하는 마음으로 등등, 수많은 이유로 이 행사에 많은 사람들이 참여해 왔습니다. 한 해도 거르지 않고 이런 행사를 하게 된 것은 모두가 하나님의 은혜 때문입니다. 이런 기도회를 통해서 그저 행사처럼 지낸 사람도 있었지만, 그중의 누군가는 특별한 하나님의 임재와 만져주심을 체험했던 아주 소중한 기도 모임이었습니다. 이를 준비하고 진행하면서 제가 고백할 수 있는 한 가지는, 은혜받는 것은 설교자나 참여자의 열심과 실력도 아닌 오직 은혜 주시는 하나님의 사랑 때문이었습니다. 올 해도 그것을 믿으며 쉽지는 않지만 어려운 길을 뚜벅뚜벅 걸어가려고 길을 나서고 있습니다.어떤 분들은 코로나가 재차 번지고 있는 위험한 시점에 더 자중하고 모임을 피해야하는데 왜 무모하게 이런 집회를 하느냐고 염려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그런 염려앞에는 저도 동감하고 있으며, 저 역시 보이지 않는 두려움이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이러다가 정말 만일에 하나 확진자가 나오면 그것을 어떻게 감당할까 싶은 두려움과 감염에 대한 두려움까지 더해지는 것이 사실이기도 합니다. 이런 집회를 하는 것은 ‘겁대가리가 없는 무모함’ 때문이 아니고, 기도하는 사람은 바이러스도 피해간다는 오만함 때문도 아닙니다. 그런데 왜 이 일을 해야 하는가 하면, 하나님이 그것을 요구하신다는 확신 때문입니다. 감염의 위험보다 더 위험한 것은 신앙생활의 나태와 잘못된 세태의 조류에 휩싸이는 위험이 더 크다고 판단하기 때문입니다.코로나 시대를 맞아 엄벙덤벙 벌써 11월을 맞이했습니다. 1년 가까이 코로나로 인해서 세월이 이렇게 의미없이 허송세월한 것만 같습니다. 물론 하나님의 시간표에는 허송이라는 것은 없겠지요. 모두가 한번도 걸어보지 못한 이 길을 당황하면서 지난 1년을 보낸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시간의 뒤에, 신앙인으로서 도둑맞은 것이 하나가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에 대한 기대감’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교회가도 감염된다. 예수를 믿는 나도 감염된다. 하나님이 이런 시기에 뭘 하시겠냐, 하나님도 어쩔 수 없다. 그러니 내가 나를 지키는 것이 최고다, 뭐 이런 생각들이 나도 모르게 가슴에 잘박힌 못처럼 박혀버린 것입니다. 그러다가 보니 기도할 필요가 없어졌습니다. 기도해도 소용없다는 패배주의가 신자들의 마음속에 부풀어 올랐습니다. 이것이 사탄이 우리들에게 쥐어준 미소입니다.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이 시대에 이렇게 침묵하시는 것처럼 보이는 까닭이 있습니다. 그것을 우리가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더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안에 불신앙의 불을 끄고, 하나님이 일하심에 대한 기대감을 다시 불 지피고, 왜소하게 보이게끔 만드는 사탄의 전략에 맞서는 방법은 다른 것이 없습니다. 오직 기도입니다. 저는 다시금 기대해봅니다. 이번 제12차 특.새에 하나님이 어떻게 역사하실지에 대한 기대입니다. 주여, 일하시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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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38
    아름다운교회 Feb 24.2021 “함께” 하는 교회 공동체
    코로나 시대를 걸어가면서 여기 저기에서 예측했던 어려움들이 현실로 나타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신앙생활과 연관되어 제가 가장 염려하는 것은 코로나의 두려움이 아닙니다. 오히려 두려움은 약과에 불과할 수 있습니다. 가장 큰 염려는 신앙생활하는 우리 신자들의 좋은 습관이 무너지는 것입니다. 기도하는 습관, 예배하는 습관, 서로 섬기며 나누는 습관, 말씀에 순종하는 습관등등의 기저 습관이 무너진다면 누가 그것들을 기뻐하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혹자의 목회자들은 모이기 보다는 흩어짐에 초점을 맞추고, 코로나 시대에 새로운 길을 제시하고 있지만 그것이 다 답이 될 수 없는 ‘현실적 허점’이 있습니다. 이론은 좋아보이는데 성도의 삶과 신앙의 현장에서는 그저 보기 좋은 ‘이상’에 불과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실제 우리의 삶을 파고 들어가다보면 이론과 실제가 다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누가 몰라서 안합니까? 알아도 못하는 것이 우리들의 현실입니다.그리스도인의 좋은 습관은 헌신 혹은 열정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Committment입니다. 우리 자신을 드리는 자세에서부터 그 신앙생활이 시작되는것이지요. 그런데 요즘 코로나 시대에 들어서서는 이러한 committment보다는 Convenience(편의성)에 의해서 우리 신앙생활이 맞추어져 간다는 것입니다. 되도록 간편하게, 간략하게, 편하게 하고 싶은 인간의 욕망과 너무나 깊은 연관이 있는 것입니다. 예배만 해도 그렇습니다. 두려움에서 시작된 비대면 예배가 이제는 좀 귀찮거나, 힘들면 그냥 주저앉아 버리려는 편의성이 강조될 것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예배는 자신의 헌신과 열정이 없으면 아무 것도 아닙니다.지난 주에 어느 집사님이 갑자기 수술을 받게 되었습니다. 코로나 시대에 너무나 당황스러운 일을 한 가정이 당한 것입니다. 그런데 생각지도 않게 목장 식구들이 마음을 다해서 함께 아파해주고, 함께 시간을 보내주고, 위로해 주는 것을 보았습니다. 혼자 감당해야 될 아픔과 당황스러움을 여러 사람이 함께 짐으로 인해서 서로가 위로를 받고 있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당하는 가족들의 얼굴에 고마움과 따뜻한 안위가 느껴질 정도였습니다. 위로는 받는 입장에서는 혼자가 아니라 ‘함께’라는 것에 적지 않은 위로가 되었습니다. 위로하는 입장에서는 이 코로나의 상황 속에서 수술받는 그 시간에 현장으로 달려가 위로한다는 것이 사실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왜냐면 제2차 유행으로 인해서 더 위험한 상황이 전개되고 있는데 자신들의 감염의 위험에도 불구하고 한 걸음에 달려간다는 것이 결코 간단한 것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나 혼자만, 우리 가족만 피하면 된다는 생각이 앞설 것입니다. 왜 그런 위험한 곳에 가느냐 타박도 받을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것들이 행동을 결정하는데 아무런 장애가 되지 않은 것은 우리가 결코 ‘혼자’가 아닌, ‘함께’라는 ‘교회 공동체’에 속해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공동체 안에 예수의 사랑이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습니다.시간이 가면서 코로나 시대는 인간은 더더욱 ‘개인과 개인주의’에 묶어두고 있습니다. 고립되게 할 것입니다. 공동체의 삶, ‘함께 함의 삶’을 부정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성경적 가치가 아닙니다. 우리는 함께 할 때에 하나님이 역사하시고, 세상을 이기게 하실 것입니다. 그것이 교회의 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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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37
    아름다운교회 Feb 24.2021 허둥지둥 하다 말 것인가?
    우리가 걸어가는 인생의 과정과 결과를 예측하고 볼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언제 무슨 일이 일어나며, 어떤 결과로 언제 우리가 인생을 마감한다는 것을 안다면 얼마나 보람있고 건강한 인생을 보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일은 우리에게 없습니다. 우리는 한 순간도 우리 삶에 대해서 예측하며 살도록 지음을 받지 않았습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그것을 알고 싶어합니다. 그것을 ‘미혹하는 영’인 귀신들의 도움을 받으려 하는 수많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한국의 대학가에 가면 ‘타로 점’을 보는 것이 유행처럼 번진 시절이 있었습니다. 국민의 50%가 그런 류를 경험해 보았다는 통계도 있을 정도이고, 그 중에는 기독교인들도 포함되어있다고 합니다. ‘기천불 신자(자기에게 도움이 된다면 기독교. 천주교.불교를 다 믿는 신자)’가 있다고 할 정도입니다. 결국 아무 것도 앞을 볼 수 없으니 생긴 문제가 아닐까 합니다. 못보니 보고싶어서 보인다고 하는 모든 것을 다 믿고 싶은 인간의 심리가 작동하는 것이겠지요.코로나를 6개월이상을 지나오면서 우리의 걸음을 생각해 봅니다. 처음 당하는 일이기에 초창기에는 쉽게 끝나겠지~라고 가볍게 생각하다가, 시간이 지나면서 불안과 초조함 염려와 두려움이 증가하고, 급기야 삶의 모든 패턴을 바꾸어 버리는 일앞에 망연자실하며 서 있는 모습을 여기저기서 발견하게 됩니다. 더더욱 언제 끝날지 모르는 이 두려움의 시간들(개인적으로는 영원히 끝나지 않고, 지속적으로 인간의 마음속에 두려움을 심어주어 영원히 어떤 것에 종속되게 만드는 치밀한 공작이 진행중이라고 봅니다)앞에 한 번도 걸어보지 못한 일들 때문에, 언제 어떻게 될지를 몰라서 그야말로 ‘허둥지둥’ 갈피를 잡지 못하고 지난 6-7개월을 보내 온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이제 우리는 약간의 경험을 통해서 배운 작은 교훈들을 얻고 있습니다. 제가 생각하기에는 이제는 이렇게 ‘허둥대는 삶’을 그치고, 뭔가 그 안에서 창조적 거듭남의 삶을 살아야 하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마치 허물을 벗어내고 진정한 영광으로 변하는 호랑나비처럼 말입니다. ‘위기는 기회’라는 어떤 사람들의 말처럼 이제 지난 6개월의 경험을 바탕으로 더 이상 ‘허둥대는 삶’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허둥대는 모습을 원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오히려 자리를 정돈하고 이 혼돈의 세상에서 새로운 마음으로 앞을 향하여 준비된 사람을 끌고 나가야 합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의 죽음이후에 얼마나 많은 혼돈을 겪었습니까? 그럼에도 예수님은 그 혼란스러운 제자들에게 마지막 사명을 부탁하셨습니다.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고 하시면서 능력을 주시겠다 약속하셨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은 뛰쳐 나갔습니다. “제자들이 나가 두루 전파할새 주께서 함께 역사하사 그 따르는 표적으로 말씀을 확실히 증언하시니라”(막16:20). 제자들이 주저 앉아 있었다면 따르는 표적을 보지 못했을 것입니다. ‘나가 두루 전파할 새’그 때에 역사가 일어납니다. 우리가 이 혼란하고 불확실한 시대에 그저 허둥지둥하다가 주신 기회도, 시간도, 은혜도 다 놓치는 것이 아닌가 싶을 때가 있습니다. 모든 것이 불확실하니 앞으로 나가려고 하지 않습니다. 나갈 때에 주님이 함께 역사합니다. 허둥지둥 보내지 말고, 믿음으로 딛고 앞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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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36
    아름다운교회 Feb 24.2021 전문가가 된다는 것은
    서예가 한석봉과 그 어머니의 일화를 어려서부터 들은 적이 있습니다. 글을 배워서 쓰는 것에 자신감이 있던 아들 한석봉에게 어머니가 불을 끄고 당신은 떡을 썰고, 아들은 글을 썼는데 어머니의 썬 떡은 일정하게 되어있는 반면에 아들의 자랑스런 글씨는 형편이 없어서 부끄러워했고, 이를 교훈의 계기로 삼았다는 이야기 말입니다. 아들은 한껏 자신이 글씨 쓰는 것에 자신감을 가졌지만 평생 어머니가 떡을 썬 그 솜씨와는 견줄 수 없을 정도였다는 것인데, 한가지 일을 해도 전문적인 일을 했던 어머니의 교훈이 두고 두고 가슴에 남았습니다. 이 이야기를 떠올리게 되는 것은 요즘 유튜브를 통해 음식하는 것을 배우면서입니다. 초보자이기에 아무리 솜씨가 있다고 해도 서툴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음식을 만들다가 보니까 아이러니 한 것은, 음식을 만들 때마다 맛이 달라진다는 것입니다. 일정하지 않습니다. 이번엔 잘되었다가도 다음엔 엉망이 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전문적으로 하는 사람들은 수십년, 수없는 반복과 실패 그리고 훈련과 계발을 통해서 자신있는 전문가로 태어납니다. 그들의 음식은 언제 어떻게 만들어도 일정합니다. 자신만의 특징이 있습니다. 그것이 전문가와 초보자가 다른 것입니다. 나름 맛집이라고 소개되는 사람들의 경우를 보아도 그냥 쉽게 돈버는 경우는 없었습니다. 어쩌다 우연이라고 하는 것은 없고, 그야말로 피땀어린 노력과 수고로 이루어지는 결과였습니다. 마치 다이아몬드를 만들어내는 과정이라고 할까요?이런 과정 속에서 배운 것은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실패없이는 성공이 없다는 것입니다. 성공은 수많은 실패의 과정을 통해서 이루어진 것입니다.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라고 배웠는데 그 말이 진리였습니다. 인생도 그러지 않을까요? 우리는 실패를 두려워합니다. 패배를 인정하지 않으려합니다. 그러나 실패와 패배가 있기에 성공이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실패와 패배속에서 패배자로 남지 않으려면 실패를 끊임없이 지칠 줄 모르게 해보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몇 번 실패하다가 지쳐서 그만둡니다. 그래서 전문가가 되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또 다른 하나는, 전문가가 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것이냐는 것입니다. 끝없는 자기와의 싸움의 과정을 거치고, 실패를 거치고, 연습에 연습, 훈련에 훈련을 통해서만 자기만의 독특한 방법으로 태어납니다. 그냥 쉽게 되는 것은 없습니다. 요즘, 사람들이 유튜브로 돈을 번다고 뛰어듭니다. 구독의 숫자를 늘리기 위하여 진기명기같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습니다. 유튜브를 볼 때마다 ‘좋아요, 구독을 눌러주세요’라는 것은 구독자를 늘려서 수익을 얻겠다는 말입니다. 과거에는 그냥 취미생활로 했을 법한데, 이것들이 이제는 돈을 벌겠다는 것으로 이어지면서 상업성이 되고 말았습니다. 아쉬운 점입니다. 그렇지만 성공하는 유튜버들도 우연한 일이 없습니다. 노력과 수고와 땀 그리고 피나는 싸움을 해야합니다. 그래야 ‘쬐~끔’ 전문가 소리를 듣습니다. 노력없이 전문가가 되지 못한다는 말이겠지요. 이러한 것이 정석(?)인데도 불구하고, 우리의 신앙생활에는 우연을 기대하면서 노력하지도 않고 신앙생활 잘하려고 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한 것이 아니겠는가 싶습니다. 목회자이든 평신도이건 신앙의 전문가가 되기 위하여서는 끊임없는 자기 실패와 훈련을 통해 참된 제자로(전문가) 거듭나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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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35
    아름다운교회 Feb 24.2021 서툰 걸음마를 보는 마음
    추석이 지난주에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번 추석은 예년과 다르게 모두에게 긴장과 씁쓰름한 느낌만을 안긴 채 순식간에 우리 곁을 지나간 것 같습니다. 하늘을 들여다보니 보름달은 왜 그리 밝게 빛나는지요! 달빛이 우리 집 앞에 서있는 가로등의 불빛보다도 밝았습니다. 그렇게 변함없이 비치는 추석 보름달도 이제는 기울어질 것입니다. 저마다 추석인사를 나누었습니다. 지난해에 우리 교회에 5명의 새 생명이 태어났는데, 이제 모두 1살이 되었습니다. 이번 추석 인사에 엄마들이 이 아이들에게 한복을 입혀서 찍은 사진을 보내주었습니다. 매주 엄마따라 예배에 나오는 엔엘이를 비롯한 귀여운 어린 아이들의 청명한 보름달같은 얼굴들을 보면서 한껏 기분 좋은 추석을 보내게 된 것 같습니다. 아이들이 못 보는 사이에 부쩍 커서 세월의 빠름을 실감하기도 했습니다. 모두의 마음과 삶에 하나님의 평안과 은혜가 가득하기를 기도합니다.인생은 모두가 ‘서툰 걸음마’에서부터 시작합니다. 뒤뚱 뒤뚱, 한 두발자국 걷다가 넘어지는 일을 반복하면서 아이들의 부모는 박수치며 좋아합니다. 말을 배워가는 과정도 신기해서 깨물어 주고 싶을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그 걸음마를 지켜보면서 어느 누구도 ‘왜 저것밖에는 못하지?’ ‘야, 좀 더 잘해봐!’ 질책하거나 비난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칭찬해주고 격려해 주며 자랑스러워하는 부모의 마음, 그것이 정상일 것입니다. 이러한 것들이 가정속에서 일어나고 있는데, 안타깝게도 교회라는 가정의 울타리에서는 잘 적용되지 못하는 것 같아 보일 때가 있습니다. 아마도 우리 모두의 어떤 ‘착각’ 때문이 아닌가 싶습니다. 교회 나오는 모두를 동일한 ‘성숙인’으로 보는 것 말이지요.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교회 공동체 안에서는 정말 다양한 사람들이 공존합니다. 이제 걸음마를 시작한 사람, 조금 빨리 걸을 수 있는 사람, 뛰는 사람, 공중곡예를 하는 사람 등, 정말 다양한 레벨의 크리스챤이 있다는 것을 우리는 잊고 사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교회 나오는 모든 사람을 동일한 레벨로 착각하고, ‘왜 저 사람은 그렇게 밖에 안되나, 왜 이렇게 못하나’ 쉽게 판단하고 정죄하고 비판합니다. 거기에는 장애자들도 있습니다. 성숙해져야 하는데 아직도 어린아이 같은 걸음마를 하는, 그야말로 장애를 앓는 사람처럼 수십년을 그렇게 지내는 사람들 말입니다. 교회에 나가면 모두가 예수님처럼 되어 있다고 믿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조금만 실수하거나 범죄하면 도매금으로 교회와 성도가 매도를 당합니다. 억울하기도 합니다.저도 그렇게 살았습니다. 그런 시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안 그래야 하는데도 불구하고, 이미 성숙한 자리에로 나가야 하는데 아직도 젖을 먹고 있는 신자들을 향한 안타까움의 정죄(?)에 빠질 때도 있었습니다. 언젠가는 자라겠지… 하는 마음으로 기다려주기도 하지만, 영~ 그런 싹이 안보일 때에는 좌절과 배신 그리고 분노와 아픔도 느끼기도 합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성도를 볼 때에 인간적인 나이에 의한 성숙도가 아니라, 영적 나이에 의한 성숙도를 먼저 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조금 인내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우리 주변에 이미 성숙해져 있어야 할 사람을 권면하기도 해야겠지만, 아직 걸음마를 하고 있는 사람을 향하여는 충분한 격려와 위로, 사랑과 관심을 가지고 박수쳐주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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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름다운교회 Feb 24.2021 나는 보호를 받고 있는가?
    지난 주에 한국에서는 대한민국 국민이 NLL을 넘어서 북한지역으로 갔다가 총살당하고 시신을 훼손당하는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그 진실은 우리가 다 알수가 없지만, 해상에서 표류하는 사람을 구해주는 것이 국제법이 규정이고, 전시에도 민간인은 보호한다는 제네바 협정도 있습니다. 좌, 우 진영논리를 떠나서라도 자국민(민간인)은 반드시 보호해야 합니다. 1년전에는 한국이 북한표류 함정을 보호하고 송환해 준 일도 있는데, 북한은 6시간이나 물속에 넣어둔채 방치하다가 총살을 한 것입니다. 이런 천인공노할 만행이 어디에 있단 말입니까? 더 문제가 되는 것은 정부나 군에서는 구출을 위한 아무런 조치도 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러고도 살인자들을 감싸고 돕니다. 북한 앞에만 서면 한없이 작아지는 이 정부 사람들을 볼 때마다 속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노벨 평화상을 받으려고 그러는 모양입니다.참담한 것은 그 문제가 정작 내 문제로 다가왔을 때, 나는 정말 나라의 보호를 받을 수 있을까인데, 대한민국 국민이면 그럴 가치가 없어 보인다는 것입니다. 대한민국 국민이 눈앞에서 총살당하는데도 ‘설마 그럴 줄 몰랐다’는 군인들의 한심한 태도는 자괴감마저 느끼게 합니다. 그럴 줄 모르고 어떻게 나라를 지킵니까? 별 짓을 하고도 남는 것이 적인데 말입니다. 나도 과연 보호를 받을 수 있을까요? 가끔 미국의 시민권을 가진 것이 다행이고 감사할 때가 있습니다. 몇 가지 과거의 경험을 통해서 보게 되는 것은 미국은 자국민을 적어도 그렇게 내버려두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할수만 있다면 적지에서도 구출해내옵니다. 그러니 미국의 국민임을 누가 서러워하겠습니까? 마치 ‘라이언 일병 구하기’라는 영화에서 보듯이 자신감과 긍지를 심어주는 것이지요.우린 대한민국 혹은 미국의 시민권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대한민국 사람처럼 보호를 못받을 수도 있고, 미국민처럼 보호를 받을 수도 있습니다. 간혹 그 반대일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우리가 ‘하늘의 시민권자’임을 밝히고 있습니다. (빌3:20). 그러면 우리는 어떨까요? 하늘의 시민권자라면 하나님 나라의 시민권자라는 말인데, 그 사람은 정말 보호받고 있을까요?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다’(요10:28-29). ‘불 가운데 걸어갈지라도 그 불꽃이 너를 사르지 못하며, 물가운데 걸어갈지라도 그 물이 너를 침몰치 못하리라’(사43:2). 하나님은 철저하게 당신의 나라의 시민권자인 우리를 보호하시고 지키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때론 고난속에 들어가는 이유는 우리가 버려진 자식이 아님을 증명하는 사건에 불과할 뿐입니다. 주님은 우리로 하여금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심지어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인생이 청청한 바다같지만은 않을 것입니다. 폭풍우가 몰아치기도 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나의 유익을 위해’ 주시는 하나님의 손길입니다. 그것을 보는 것이 믿음입니다. 뭘 두려워하십니까? 정말 우리가 무엇을 두려워하는 것인지, 그리고 무엇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할 것인지 심각하게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주님은 우리가 두려워 아무 것도 못하는 존재가 아니라, 믿음으로 두려움을 극복하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받는 자녀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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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름다운교회 Feb 24.2021 사랑과 섬김
    언제가 이런 예화를 설교중에 든 적이 있습니다. 어느 부자가 가난한 동네의 집집에 하루에 1불씩 돌리기로 했습니다. 처음에는 1불을 받아든 사람들이 기분나쁜 표현을 했지요. 왜 이런 돈을 주는지 알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이 사람은 하루도 거르지 않고 매일 1불씩을 돌렸습니다. 몇 개월이 지나자 사람들은 오늘도 오는 1불을 기다렸습니다. 조금 더 시간이 지나자 어느 날 1불이 오지 않거나 늦게 오면 화를 내며 짜증을 내기도 했습니다. 마치 사람들은 내가 누려야 할 당연한 권리가 되어버린 양 1불을 요구하기 시작한 것입니다.이러한 예가 단지 우화처럼 존재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들의 주변에서도 너무나 쉽게 볼 수 있는 현상입니다. 사람들은 자신이 받고 있는 섬김이나 사랑이 너무나 당연한 권리처럼 생각하고 있다는 것이지요. 하지만 작은 섬김이나 사랑 혹은 그것이 작은 배려라고 할지라도 그것들은 내가 당연이 누려야 하는 권리가 아니라 축복이라는 것을 알기에는 너무 연약한 존재가 인간이 아닐까 합니다. 심지어 우리가 운전을 하면서 차선을 지키고, 제한속도를 지키는 것도 사실은 ‘법규’이기도 하지만 그 법규를 지키며 산다는 것은 우리가 남을 위한 ‘배려’이기도 하다는 것을 잊어버립니다. 얼마 전, 한국에서는 포르세를 몰던 40대 남자가 환각상태로 과속을 하다가 오토바이와 차량등을 들이받아 구속된 사건이 있었습니다. 지킬 것을 지키지 않으니 남에게 불행을 안겨주는 것이지요. 이것을 반대로 생각하면 우리가 지킬 것을 지키면 남들을 보호할 수 있는 배려이기도 합니다. 교회안에서 일어나는 일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지금처럼 코로나 팬더믹으로 힘들어하는 상황속에서 우리는 서로를 배려하며 살아야 합니다. 인간은 어느 누구도 혼자 존재할 수 없는 의지(依持)적 존재이기 때문이니다. 감사하게도 우리는 이런 상황속에서 서로가 서로를 배려하고 사랑하며 살도록 창조되었고, 그 일을 우리의 사명처럼 알고 온 세상의 모든 사람을 사랑할 수는 없어도, 우리 교회, 우리 목장 식구들이라는 작은 공동체만은 사랑할 수 있는 작은 능력은 가지고 있어 보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서로를 돕고, 이해하고, 사랑하고 배려하며 살도록 하나님의 말씀은 늘 리마인드해 주고 있습니다. 하지만 앞서 이야기한 바대로, 우리가 받은 그러한 사랑과 섬김 혹은 작은 배려는 누군가의 작은 헌신과 희생으로부터 시작한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교회에 들어서면 말끔하게 단장된 화단과 뽑힌 풀들, 자라고 있는 나무와 꽃들 그리고 예배실의 예쁜 꽃들, 상쾌한 실내 분위기들뿐만 아니라, 우리가 먹는 김치 한쪽마저도 그저 스스로 존재한 것이 아닙니다. 누군가의 헌신이 있었고, 마리아의 옥합처럼 깨트려진 물질이 있었고 흘려진 시간과 땀 그리고 마음과 정성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러한 일들을 마치 내가 당연히 누려야 할 권리쯤으로 생각하고 아무 생각과 배려없이 불쑥 한 마디씩 던지는 말들이 깊은 상처를 남기기도 합니다. 왜 꽃은 그런 것만 하느냐, 나라면 저렇게는 안한다, 다른 풀은 왜 안뽑냐… 헌신하고 수고한 분들을 아프게 합니다. 그런 말을 하기 전에 내가 한번 해보면 어떨까 싶습니다. 내가 하면 더 잘할 수도 있겠지만 대부분은 그러지도 못합니다. 내가 받고 누리는 사랑은 누군가의 수고라는 것을 기억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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