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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칼럼(박대우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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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름다운교회 Dec 31.2023 감사로 한 해를 닫습니다
    한 해가 저물어갑니다. 하루 남은 이 한해를 뒤돌아 보면서 누구나에게 주어진 시간의 공평함과 경외감을 느끼게 됩니다. 지나 온 모든 날들 그리고 겪었던 수 많은 일이라는 한 해의 짐을 싸면서 그 마무리 한 마디를 ‘감사’라 적고 싶습니다. 우리의 인생은 우리가 누려야 할 당연한 권리가 아니라, 하나님이 은혜 베푸시지 않으면 감히 누릴 수 없는 선물이었음을 안다면 우리는 더욱 감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늘 크고 작은 선물을 받아온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 선물을 받을 때마다 감사하다고 생각하며 살았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늘 받던 선물이 오지 않게 되자 기분이 상하기 시작했습니다. ‘아, 이 사람이 나를 무시하는건 가?’라는 생각이 들어오자 견딜 수 없었습니다. 마침내 화가 나서 따졌다고 합니다. ‘왜 나를 무시하느냐’고 말이지요. 이처럼 사람들은 공짜로 받고 있는 삶의 은혜앞에서도 당연히 내가 누려야 할 권리라고 착각하며 감사하기를 잃어버리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우리는 그런 사람을 ‘짐승보다 못하다’는 말로 경멸을 보냅니다. 은혜에 대한 감사가 그만큼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가만히 돌이켜보면, 감사는 인간에게 주어진 의무가 아니라 특권이라는 것을 깨닫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인간에게 여러 가지 아름다운 것들을 주셨는데, 그중에 감사할 수 있는 것은 영광스러운 특권입니다. 인간만이 할 수 있는 위대한 결단입니다. 이것은 정말 아무나 할 수 없는 특별한 권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 즉 ‘특권’ 을 주셨다고 하셨습니다(요1:21).  그 특권과 함께 또한 성령을 선물로 주셨고, 그리스도인들은 자기의 욕구가 아닌 주님의 마음을 이 땅에 펼치는 제자로 살도록 성령의 도우심으로 능력적 사역을 감당할 특권 또한 주셨습니다. 일하는 자에 게는 할 수 있는 능력의 특권을 주신 것이지요. 그리고 그러한 사람들, 특별히 성령의 보호와 은혜속에 하나님의 일들을 하는 사람들에게는 성령께서 함께 하시는 열매들을 주셨습니다. ‘사랑, 희락, 화평, 인내, 자비, 양선, 충성, 온유, 절제’라는 열매를 맺게 하셨습니다. 그 사람이 성령의 사람이냐 아니냐는 나타나는 표적이 아니라 ‘열매’로 알게 됩니다. 그런데 그 성령의 열매중에 ‘감사와 믿음’이 포함되지 않았을까요? 묵상하다가 깨닫게 된 것은 성령의 열매의 결과는 결국 믿음과 감사로 귀결되기 때문입니다. 성령의 사람들은 늘 감사와 믿음을 고백하는 삶을 삽니다. 한 해를 보내면서 ‘감사’로 보내고 싶습니다. 감히 받을 수 없는 죄인에게 베푸신 사랑도 감사하고, 살면서 눈에서 피눈물을 흘리도록 아픈 일을 당했다 할지라도 그것은 나를 하나님의 사람으로 새롭게 세우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이라는 것을 알게 되며 감사하고, 우리의 기대와 기도이상으로 가장 좋은 것으로 열매를 따게 해 주신 그 하나님의 은혜에 정말 감사의 고백과 함께 이 한해를 마무리하고 싶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원망하다가, 불평하다가, 망했던 광야백성이 되지말자’고 하였습니다. 생각해보면 억울하다고, 힘들다고, 왜 내게만 이런 고난을 겪게 하시는 것이냐고 따져묻고 싶을 때도 있었을 것입니다. 부모님의 마음을 다 헤아릴 수 없는 자식처럼 살아도, 그 부모님의 마음을 헤아 릴 때가 오는 것처럼, 다 이해하지 못해도 감사로 주님께 나아가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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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름다운교회 Dec 24.2023 성탄은 하나님의 은총입니다
    성탄절이 다가왔습니다. 매일 매일이 구원의 은혜에 대한 감격적 삶의 예배인 것은 분명하지만, 그래도 성탄절, Christmas의 날을 기리는 특별한 은혜가 있습니다. 어려서부터 한국에서 신앙생활을 시작한 분들에게 성탄절은 White Christmas를 고대합니다. 하얀 눈에 덮힌 온 천지를 바라보며, 성탄 새벽송을 나섰던 전통은 잊을 수 없는 추억의 미묘입니다. 여러 구역으로 나뉘어 어른부터 아이들까지 성도들의 가정을 돌기도 하고, 소방서, 경찰서등의 관공서를 들러서 ‘기쁘다 구주 오셨네!’를 부르며 아기 예수님의 탄생을 알리며 다녔던 일은 마치 내가 천사가 되어 구주 예수님의 탄생을 알리는 기쁨처럼 여겨졌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아마도 이런 일은 지금은 없어졌을 듯 합니다만 그때가 그리워집니다. 나이가 들어서 어른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목사가 되어서 종교의 중심에 선 사람이 되었고, 수십년이 흘러, 새로운 세상에서 사는 듯한 느낌이 들면서 성탄의 정신과 의미가 희미해져가는 것을 바라보면서 내 안에 성탄의 감사와 감격을 다시 불러 일으켜야 한다는 강렬한 마음이 드는 시간이기도 합니다. 요즘 제가 스스로 깨닫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머무를 자리가 없다는 것을 말입니다. 오히려 강퍅해지고, 굳어지고, 기쁨이 사라지고 있다는 것을 느끼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아내의 한 마디가 나를 돌아보게 했습니다. ‘얼굴의 근육운동을 해 보세요. 너무 굳어있어요!’ 안타깝게 내 뱉는 아내의 이 한마디를 들으며 갑자기 정신이 번쩍 드는 것이었습니다. 그러고 보니 너무 굳어졌다는 것이 보였습니다. 마음이 완악해지고, 굳어져서 강팍해졌다는 것이 보였습니다. 가슴이 아파왔습니다. 마음의 쓴뿌리와 죄악의 쓴뿌리가 섞여져 내뱉는 신음에, 다친 사람들이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어느 집회의 찬송과 기도를 유튜브로 동참하면서 깊은 회개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주님의 은혜에 집중하지 못하고 환경에 집중하다가 잃은 영성과 감사가 떠올랐습니다. 무엇이 이렇게 척박하게 했던가를 기억하며 회개 기도를 마음속에서 올렸습니다. 주님은 나를 위해서 ‘하늘의 영광스러운 가장 고귀한 자리까지 버리시고’ 이 땅에 가장 낮고 천한 자리로 오셨는데, 그것이 성탄절인데, 나는 이미 너무 높은 곳에 앉았다는 것을 다시 깨닫게 되었습니다. 내가 죄인이 아니어서가 행복한 것이 아니라,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나같은 죄인을 위해서 이 땅에 오신 것이 ‘은총이요 은혜’입니다. 그것이 바로 성탄절의 정신이요 의미입니다. 주님은 죄인이 아닌 사람을 위해 오시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죄인을 위해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외치기를, 주님이 죄인을 위해 오셨다면 “내가 바로 그 죄인일 뿐만 아니라 죄인가운데서도 가장 질이 나쁜 괴수”라고 자칭하였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은혜를 아는 사람의 자세입니다. 내 안에 그 은혜를 잃어버렸던 것입니다. 은혜가 내 안에서 사라지니 미움이 대신하고, 원망과 전쟁이 자리하였습니다. 베가스에 눈이 내리지는 않습니다만, White Christmas를 기대했던 어린 시절처럼, 온 세상을 하얀 눈으로 덮인 것을 보면서 우리의 더러운 죄악도 덮어주시려 이 땅에 오신 주님 의 은혜를 기리고 감사하고, 나같은 죄인을 위해 이 땅에 오신 주님을 찬송 하는 은혜를 내 안에서 회복하기를 기도합니다. 주님, 내 안에 다시 와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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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00
    아름다운교회 Dec 17.2023 자기 자리 찾기
    지난 15년동안 교회를 담임하는 목회자로서 하나님이 베푸신 은혜를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찬송가에 ‘하늘을 두루마리를 삼고, 바다를 먹물로’ 삼아 하나님의 은혜를 기록한다해도 하늘이 좁고, 바다의 먹물이 모자랄 정도라고 하듯이, 정말 하나님의 지극히 큰 은혜가 있었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허물도 많고, 약점도 많고, 쓸모도 별로 없는데도 불구하고, 여기까지 써주심에 그저 감사할 따름입니다. 이제 내년 한 해를 보내면 목회의 현장에서 완전히 내려와 평신도의 자리에 앉게 되겠지요. 요즘도 후임목사님이 온 이후로 설교를 서로 분담을 하고 있습니다. 내가 설교를 하지 않을 어느 첫 날이었습니다. 그동안 1인 목회자로서 앉아있는 자리가 정해져 있었기에 고민할 이유가 없었습니다만, 이제 설교 강단에서 내려오니 어디에 앉아야 하는지가 고민이 되었습니다. 어느 자리에 앉아야 내가 편하고, 교인들이 불편하지 않을까 생각하며 자리를 찾아보았습니다만, 우리 성도들이 나름대로 가장 좋은 자리를 선점(?)하고 있어서, 저의 자리를 찾아 앉는다는 것은 지금도 어렵습니다. 모든 사람에게 자리가 있습니다. 있어야 할 곳에 있는 그 자리, 부모의 자리, 부부의 자리, 자녀의 자리, 성도의 자리, 목사의 자리, 장로/권사/안수집사의 자리가 분명히 있습니다. 이 자리가 안정감있게 실행되어야 내가 소속된 공동체가 아름답게 됩니다. 어느 누구의 자리를 누군가가 대체할 수가 없습니다. 그 자리를 다른 사람이 대체하게 될 때에 혼란이 생기고 몸살이 나는 이유도 거기에 있습니다. 목회자는 목회자의 자리를 지켜서 그 맡은 본연의 임무를 감당해야 하고, 장로와 권사도 섬김과 봉사라는 본연의 임무를 성실하게 실행해야 합니다. 성도는 성도의 자리에서 영적 성장과 사랑의 사역을 지속적으로 아름답게 도모해야 합니다. 각자의 자리를 지킬 때에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는 건강하게 자라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만일 그 자리가 뒤바뀌게 된다면, 우리는 그것을 ‘기형’이라고 부릅니다. 코가 눈의 자리에 붙어있거나, 다리가 팔의 위치에 있는 것처럼 보기가 흉한 것이 없습니다. 그래서 자기 자리에 자기가 있을 때에 가장 안정적이고 보기도 좋고, 가장 효과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 교회는 이제 팬데믹의 공황을 지나, 부흥의 불씨를 안고, 성령의 거룩한 은혜의 바람을 받으며 이제 제3의 도약을 하려고 하는 아주 중요한 시기에 있습 니다. 그래서 과거의 옷인 낡은 옷을 벗어내는 일을 하였습니다. 그 첫 번째가 담임목사의 세대교체입니다. 이것은 성공적으로 이루어졌음을 저는 확신합니다. 그리고 조직의 교체입니다.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으라’는 말씀처럼 새로운 담임 목회자가 와서 일할 수 있는 여건을 잘 만들어 주는 일이 두 번째 작업인데, 교회의 의사결정기구와 목장을 새롭게 하는 것이 이런 일들입니다. 그 동안 내 손에서 이루어졌던 일들이 남의 손에서 이루어지는 것을 보는 것은 ‘속상함’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내는 ‘기쁨’이라고 표현해도 무방할 것입니다. 각 사람이 자신의 은사대로 ‘자기의 자리’를 찾아 일할 수 있다면 그것은 ‘억울함’이 아니라 ‘행복’일 것입니다. 우리 각자가 그 행복을 누렸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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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99
    아름다운교회 Dec 10.2023 내가 사랑한 것은 무엇이었을까?
    페북에서 본 영상중에 공감되는 것이 있어서 소개하려고 합니다. 중국의 어느 토론 자리에서 두 학자가 맞붙었던 것 같습니다. 한 사람이 이렇게 주장합니다. “중국 공산당이 대체 뭘 잘못한 것입니까? 공산당 때문에 이만큼 먹고 사는 것 아닙니까?” 그러자 다른 학자가 진지하게 이렇게 대답을 합니다.“제가 진실을 말해줄게요. 1950년부터 3년간 토지개혁이 있었어요. 개혁이 시작한 1년만에 땅을 갖고 있던 농민 중 260만명이 죽었어요. 농부가 없으니 굶주림이 시작되었죠. 1962년에 공산당 전체회의가 열렸어요. 자연재해라고 결론냈죠. 그렇게 굶어 죽은 사람이 4,300만명입니다. 중국역사를 통털어 굶어죽은 사람 숫자를 다 합쳐도 이보다 훨씬 적습니다. 그리고 1931년 일본이 동북삼성을 침략했죠. 당시 일본이 14년간 통치했는데 그때 죽은 중국인 숫자가 2,100만입니다. 1949년부터 마오쩌 뚱이 통치한 28년동안 중국 공산당이 통치하는 동안 8,000만명이 사라졌습니다. 일본인 전쟁에서 죽인 중국인의 숫자보다 4배란 말입니다. 학자라면 진실을 말할 줄 알아야죠. 당신도 학자이고, 나도 학자입니다. 근데 차이점이 딱 하나 있습니다. 당신은 공산당을 사랑한 것이고, 나는 중국을 사랑한다는 것입니다.” 이 짧은 토론을 들으면서 가슴이 먹먹해짐을 느꼈습니다. 진실을 말하겠다고 이야기하는 학자의 진지함속에 묻어 나오는 한마디, ‘당신은 공산당을 사랑한 것이고 나는 중국을 사랑한 것이 차이점이다’고 하는 이 대목에서 가슴이 울렸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예수님을 사랑한다고 말합니다. 주님을 따르겠다고 매 주일 찬양과 말씀을 들으며 헌신을 다짐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열심을 내기도 합니다. 열심히 섬기기도 하고 희생도 합니다. 내 몸이 부서져라 희생과 봉사를 아끼지 않습니다. 주님이 기뻐하실 것이라고 믿으며 모든 고난과 비난 그리고 수모와 수치까지 감당해 냅니다. 영광의 박수를 받을 때도 있습니다. 그러면서 위로를 받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은혜의 조명이 내 안에 비추일 때에 깨닫게 된 것이 있습니다. 그게 주님이 아니라, 나를 위한 것이었음을 알게 된 것이지요.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나를 사랑하고, 나의 명예와 자랑을 위해서 뽐냈던 것임을 알게 된 것입니다. 내 의견과 내 주장이 먹히지 않으면 안에서 분노가 치밀어 오릅니다. 짜증이 납니다. 그동안 참고 인내해왔던 모든 것, 그동안 모든 것을 다 해서 헌신하고 희생했던 것들이 아까워지는 것입니다. 원망과 불평이 고개를 들고, 치떨리는 분노가 사라지지 않으며, 억울함과 야속함으로 지금까지 걸어왔던 모든 것을 뒤엎어버리고 싶다는 마음이 올라옵니다. 진정으로 주님을 위하고 교회를 사랑하고 위한다고 생각했는데, 가만히 생각해 보면 그것이 아니 었던겁니다. 내 명예, 내 위치, 내 자랑을 위해서 해왔다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저 중국의 학자의 이야기처럼, ‘공산당’(내가 누릴 유익)을 사랑했던 것이지, ‘중국’(하나님과 교회)를 사랑한 것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저는 제 스스로에게 질문하고 싶습니다. 이제 목회를 내려놓아야하는 시간앞에서 진지하게 묻고 싶습니다. ‘박목사, 그동안 네가 사랑한 것이 무엇이었느냐. 공산당이었느냐, 중국이었느냐?’ 내 명예와 내 헌신이 주님보다 더 중요했던 것은 아닐까 깊이 반성해 봅니다. 우리 인생의 마지막이 잘 정리될 수 있기를 기도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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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름다운교회 Dec 03.2023 명품사랑
    명품, 솔직히 수많은 이들의 입에 회자되고 있는 몇 가지 명품외에는 어느 부분에 어떤 제품이 명품인지 나는 알지 못합니다. 명품은 제게 관심의 대상이 아니다보니까, 아니 더 솔직하자면, 그것을 구입할 능력이 안되기에 일부러 외면 을 한 것일 수도 있습니다. 특별히 지난 펜데믹을 지나면서 명품시장은 전례없이 사상 최대의 성장을 기록했다고 경제계에서 회자되고 있습니다. 어느 명품브랜드는 200%가 넘는 주식가치가 상승했다고 합니다. 세계 경제가 어려운 시대에 명품시장들은 오히려 더 성장했다고 합니다. 특이한 것은 한국은 명품업체의 중요한 고객이라고 하는데, 한국인의 명품사랑은 유별나다고 하네요. 그래서 한국에서는 Open run이라는 신조어가 생겨나서, 제품이 들어오기만하면 줄서서 달려간다는 말이 있을 정도입니다. 명품은 ‘과시욕. 만족감, 자기애, 보상심리’등의 다양한 심리욕구에 의해 구매되어진다고 하는데 그것이 있음으로 신분상승의 기회로 여기는 사회분위기와 무관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과연 명품이 그만한 가치가 있을까요? 저는 비교적 가성비를 따지는 입장이라서, 명품의 가치는 인정 하지만, 명품을 쓰는 일이 거의 없는데도 요즘 자그마한 경험 하나가 명품에 대한 생각을 다시하게 하는 일이 있었습니다. iPad를 여러 모양으로 잘 사용하고 있는데, 늘 Keyboard를 가성비를 따라 저렴한 것들만 골라서 사용하다가 보니, 얼마지나지 않아 문제가 발생하여 속을 상한 적이 많았습니다. 제대로 된 명품(?)같은 것을 사기에는 너무나 비싸서 늘 미루고 있던 차에, 마침 고장이 나서 Black Friday Sale에 눈에 들어온 Keyboard 분야의 명품을 큰 맘먹고 구입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아, 이래서 사람들이 명품을 찾는구나~’라는 생각을 갖게 할 정도로 너무나 편하고, 가볍고, 제대로 된 것임을 확인하게 된 것입니다. 무조건 비싸다고 명품은 아닐 것입니다. 그런데 명품을 모르는 제게도 이렇게 좋은 것도 있다는 생각을 바꾸게 할 정도로 명품은 명품이었습니다. 신앙생활에도 명품이 있다는 것을 아십니까? 무조건 은혜받았다고 명품신앙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에 ‘진주를 돼지에게 던지지 말라’(마7:6)고 하였습니다. 왜냐면 돼지는 진주의 가치를 모르기 때문에 아무렇게나 쑤셔넣을 것이기 때문 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명품처럼 귀한 것입니다. 세상에서 돈주고 살 수 없는 귀한 보배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서 내가 그것을 빛내지 못한다면 그 은혜 가 빛을 바래서 명품으로 인정을 받지 못하게 되는 것이지요. 명품인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서도  얼마든지  무가치하게  만들수가  있고, 보물이  보물로  드러내지 못하게 될 수도 있습니다. 아름다운 명품을 아름다운 사람이 사용하면 정말 아름 답게 빛이 납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은혜되어야 하는데, 욕이 되게 하면 안됩니 다. 은혜를 받았어도 오히려 은혜가 욕으로 작용하는 삶을 산다고 하면, 차라리 은혜가 없는 것이 나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라는 명품은 ‘겸손한 사람’에게 주어지면  빛이  납니다만, ‘교만한  사람’에게  주어지면  은혜의  빛이  망가집니다. 자기를  낮추고  주님을  높이는  자에게  명품은  ‘아로새긴  은쟁반에  금사과’ (잠 25:11)처럼 빛이 납니다. 신앙이 우리안에서 명품의 진가로 발휘되기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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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97
    아름다운교회 Nov 26.2023 보물을 찾다
    한 해의 사역과 그동안 평생을 달려온 목회사역을 정리하는 시간앞에 서면서 크고 작은 변화들이 제 주변에서 일어나는 것을 보게 됩니다. 한 평생을 목회라는 환경속에서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여기까지 왔는데, 이제는 그 사역을 내려놓을 것을 작정하고 교회에 새로운 에너지를 불어넣기를 원해서 조기 은퇴를 겁없이(?) 결정하고 나니 주변에서 우려와 기대의 마음을 건네주었습니다. 이제 제2대 담임목사가 부임하고 하나씩 세대교체의 작업을 진행하고 있지만 허탈과 서운함보다는 정말 잘했다는 기쁨이 더 크다는 것이 제게는 참 놀랍습니다. 언젠가 아내와 이런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내 목회사역 가운데 가장 잘한 것이 있다면 두 가지를 꼽을 수 있는데, 하나는 교회를 개척할 수 있었다는 것과 조기 은퇴를 결정한 것이 나와 교회를 위해서 정말 신의 한 수였다는 것입니다. 그런 고백을 할 수 있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모릅니다. 어떤 분들은 은퇴를 하고 싶지않아서 나이를 고치고, 법을 어기면서까지 오랫동안 머무르려고 합니다. 100세 시대에 나이 70도 젊다는 생각과 인생은 70부터라는 사회적인 격려가 있어서  그런 것 같습니다. 가만히 보면 그런 것 같기도 합니다. 그러나 저는 다른  생각을 합니다. 아무튼 이른 은퇴를 결정하고 나서 제 눈에 하나님은 한 가지 좋은 은혜를 주셨습니다. 지난 날들을 돌아보면서 원망하고, 섭섭하고, 가슴을 끊어내는 아픔도 있기에 당연히 그런 것들이 쓴뿌리가 되어서 작동되는 것이 아니라, 기억에 남는 일들은 그저 감사하고 주옥같았던 일들만 가슴에 남게 하셨다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모릅니다. 그러고 보니, 그동안 안보였던 보물같은 사람들이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흔히 눈에  콩깍지가 쓰였다는 말을 합니다. 사실 그 사람이 달라져서 사람의 가치가 달라진 것이 아닙니다. 물론 신앙적 변화는 그렇게 만들기도 합니다만, 그렇지 않다할지라도 그것은 우리 눈에 무엇인가 콩깍지가 쓰였기 때문일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의 ‘콩깍지’가 내 눈에 씌여지니 사람이 달라보이기 시작한 것입니다. 버려진 폐기물이 아니라 감추어졌던 보물이었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은혜이고, 그것이 바로 우리의 신분입니다. ‘죄와 허물로 죽었던’ 우리, 세상의 온갖 찌꺼기같은 욕심과 욕망으로 뒤덮혀 살던 우리를 ‘하나님의 걸작품’으로 바꾸어 놓으신 것이 예수믿는 우리들이라고 성경은 증거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안에서 우리를 보물로 바꾸어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우리 모두의 허물을 대신 지시고 자신의 목숨을 버리셨습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안에서 ‘한 새로운 사람을 지어’ ‘보물’로 바꾸시기 위한 하나님의 극약처방이었습니다. 그래서 십자가를 통과한 한 사람, 한 사람이 그리스도안에서 ‘보물’입니다. 만일 내가 바라보는 사람이 미움의 대상으로 보이면 내 눈에 은혜의 콩깍지가 없기 때문이고, 충분한 은혜가 없다는 것을 스스로 증거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은혜받으면 세상이 달라보이고, 사람이 달라보입니다. 오늘은 하나님께서 보내신 보물을 발견하는 날입니다. 그야말로 보물찾기입니다. 오늘이 우리 모두에게 보물로 발견되어지는 축복의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나도 주안에서 보물이 되고, 다른 사람도 주안에서 보물로 인정되어지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큰 보물은 바로 당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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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름다운교회 Nov 19.2023 거룩한 소명을 향하여
    지난 3주간의 특.새는 우리 교회로서는 큰 축복의 산실입니다. 이 3주의 특별 새벽 부흥회를 통해서 교회가 살아갈 능력과 영적 자원을 공급받는 발전소 역할 을 지난 15년동안 해 왔습니다. 이 기간을 통해 성령의 공동체성을 회복하고, 신앙이 성장, 성숙해지고,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는 훈련의 장소가 되었음을 부인할 수가 없습니다. 그냥 모이는 집단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과 임재를 체험하는 교회로서의 사명을 재발견하고 충전하는 기회입니다. 각 교회마다 교회를 교회되게 하는 여러 사역이 있습니다만, 우리 교회는 이 3주간의 특별한 부흥집회를 생명처럼 여깁니다. 새벽에 어린 아이부터 어른에 이르기까지 합심하여 하나님의 은혜를 간구하고, 생명의 불길을 가슴에 품는 사역을 하는 교회를 저는 베가스에서 본 적이 없습니다. 지금까지 하나님께서 교회의 촛대를 옮기지 않고  두시는 은혜가 바로 이 특.새의 기도회를 통해서임을 고백하게 됩니다. 특별히 이번의 특.새는 후임 목사를 청빙하고, 처음으로 갖는 시간이어서 두 명의 담임목회자가 공동으로 사역하는 첫 시험대였기에 더욱 보람과 의미가 있었고, 한 마음으로 성도들과 함께 세워가는 기회가 되었습니다. 많은 분들이 동사 목회를 염려했는데, 이번 기회에 그런 염려가 단순한 기우였음을 보여주는 시간 이기도 했을 것으로 보입니다. 우리는 우리 나름대로의 아름다운 전통을 세워가면 됩니다. 옆 사람 이야기를 들을 것이 없습니다. 다른 교회의 실패한 경험을 들먹일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는 우리 나름대로의 성숙함을 통해 아름다운 세대 교체를 이룰 수 있음을 믿고 그 길을 믿음으로 걸어가야 합니다. 그것이 지금까지 우리 교회를 세우신 하나님의 방식이었습니다. 안될 것 같은데, 실패할 것 같은데도 승리하게 하시는 은혜말입니다. 감사하게도, 새로 부임한 권목사는 우리 교회가 기존 가지고 있는 영적 가치와 목회의 패턴이 크게 다르지 않는 영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목사님과 사모님이 기도하는 사람이요, 겸손한 사람이요, 긍정과 믿음의 사람이기 때문에 충분히 아름다운 사역의 세대교체가 이루어질 것을 저는 확신합니다. 얼마전에 아내와 대화를 나누는 중, 내가 목회하는 일 가운데 가장  잘한  것이 두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교회를 개척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조기 은퇴를 결정함으로서 나의 희생과 포기를 통해, 교회가 은혜의 길로 들어서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베가스 교회들 가운데 최초로 자연스럽고 은혜스럽게 세대 교체를 이룬 교회가 되는 역사적 기록을 세우게 될 것입니다. 그동안 교회 마다 목회자가 교체되는 것은 어려운 사연이 있어서, 전임 목사가 물러나고, 후임이 오는 패턴이지만, 우리의 경우는 전임 목사가 은퇴를 하면서 교회의 원로로 남고, 후임목사가 들어와 목회를 하는 가장 아름다운 모습입니다. 우리 교회가 모범적인 세대 교체의 길을 연 것이지요. 하나님께서 일하시고 계시다는 것을 이번 기도회를 통해서 보게 하셨습니다. 사막에 강과 길을 내시는 놀라운 일을 지금 하나님께서 시작하셨습니다. 이 감사의 계절에 베푸신 은혜를 되돌아 보면서 영광을 돌리게 됩니다. 아무리 많은 일을 하고, 능력으로 사역을 했어도, 감사라는 가장 기본을 잃으면 모든 것을 잃습니다. 감사로 열매 잘 거둡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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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름다운교회 Nov 12.2023 진통제가 답은 아닙니다.
    환자들을  괴롭히는 것은  통증입니다. 그래서  환자들에게는 어김없이 진통제를 처방합니다. 수술을 하든지, 사고를 당해서 아플 때에든지 진통제는 훌륭한 약제임은  틀림이  없습니다. 진통제가  없으면  치료의  과정속에서  정말 고통스럽게 지나야 하지만, 진통제가 있음으로 인해서 길고 험난한 치료의 과정을 견딜 수 있는 혜택이 있습니다. 하지만 진통제는 치료제가 아닙니다. 가령, 암환자를 살려 내는 것은 암을 이겨내는 항암제입니다. 그것이 암세포를 죽이는 역할을 합니다. 다만 그 과정속에서 부차적으로 따라오는 통증을 일시적으로 가라앉히거나 잊게 해주는 역할을 하는 것이 진통제입니다. 제 경우에 있어서는 가만히 보니, 통증을 가라앉히는 것보다는 통증을 잊게 하는 것이 맞는 것 같습니다. 진통제의 효능 시간이 지나면 어김없이 통증은 다시 오는 것을 보면, 진통제가 몸안에서 작동하는 시간동안 통증을 잊게 해줍니다. 통증을 못 느끼거나 잊었다고 해서 우리의 질병이 끝났다고 보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진통제가 효력이 끝나는 순간에는 본질적인 고통의 문제는 다시 떠오르게 마련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진통제는 치료제가 아니라 ‘잊게  해주는’ 보조제일 뿐입니다. 잊었다고 해서, 느껴지지 않는다고 해서 문제가 해결된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인생도 그러하다고 생각됩니다. 많은 사람들이 인생의 근본적인 문제앞에서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고된 노력을 합니다. 하지만 어떤 분들은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하는 처방전을 받기 보다는 일시적으로 통증을 완화해주는 진통제를 통해서 잊으려고 하는 분들이 제법 많이 있습니다. 지금의 고통은 잊을 수 있지만 문제는 여전히 상존해 있습니다.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은혜가 늘 충만하고, 행복한 신앙생활이면 얼마나 좋을까요, 하지만 때로는 삶의 작은 가시로 인하여 심각한 질병을 앓게 될 때가 많습니다. 그럴때에도 많은 신앙인들이 진통제에 기대서 문제를 해결하려는 사람이 많이  있습니다. 내가 잊었다고 해서 문제가 해결된 것이 아닌데도, 잊는 것으로 문제가 해결된 것처럼 착각하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에 침체가 찾아오기도 합니다. 교회 생활에 권태기가 찾아오 기도 합니다. 내가 잘하고 있는지 회의에 빠지기도 합니다. 때로는 여전한 죄책감에 시달리기도 합니다. 그럴  때마다  ‘나는  괜찮을거야’라는 식으로 진통제를 먹고 기다린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신앙생활에서 오는 문제의 대부분은 누구 때문이 아닙니다. 어떤 일 때문이 아닙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오는 위기인데, 일시적인 진통완화 효과에 기댄 채, 문제를 해결하려는 것은 우매한 일입니다. 결과가 있으면 원인이 있기 마련입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분명하게 이야기합니다. 일이나 사람이 문제가 아니다. 무지와 무식이 문제가 아니다. 심지어 감정의 문제조차 하나님께서는 하나님과의 관계속에서 회복할 것을 명령하십니다. 하나님께 돌아가고, 예수 그리스도와의 친밀한 관계로 회복할 때 근본적인 문제가 해결됩니다. 그 일을 성령께서 하십니다. 우리는 진통제에 의존해서 병을 나으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근본적인 치료책을 얻기 위하여 오늘도 특.새의 자리로 나아갑니다. 그래서 이 특.새는 얽어매는 족쇄가 아니라 자유케 하는 능력의 장소입니다. 남은 한 주간을 세상의 진통제가 아닌 참된 치료제가 되길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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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94
    아름다운교회 Nov 05.2023 점심을 좀 늦게 먹으면 안될까요?
    베가스에 처음 부임하여 교회를 담당할 때입니다. 주일이면 모든 부서에서 분주하고 치밀하게 그리고 긴장하면서 여러 일들이 동시에 이루어지기에 목회자에게는 주일이 가장 신경써지는 날이기도 합니다. 오감육체가 촉을 세워지는 것은 물론이고, 설교와 예배에 대한 부담으로 인해 극도의 신경이 날까로운 날입니다. 그러한 여러 가지 일들 가운데, 예배는 모든 주일 사역가운데서 가장 중요한 일이고, 사실 교회의 가장 주된 사역이기도하지요. 다른 사역은 몰라도 예배는 하나님앞에서 드려지는 것이기에 한치의 오차나 방심이 허용되지 않으며, 은혜의 통로가 되기에 가장 중요한 일입니다. 그래서 예배를 강조하는데, 한 가지 마음 에 걸리는 일이 있었습니다. 주방사역팀이 열심히 사역을 하고 있는데 예배에 소외되고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된 것입니다. 당시에 몇 집사님들이 아침 일찍부터 와서 음식을 다루고, 성도들이 주일 점심에 먹을 식사를 준비하는데 예배에 참석 하지 않고 스피커를 통해서 중계되는 것을 들으며 주방봉사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분의 노력과 정성이 대단하지요. 그런데 생각해 보면, 그분들도 예배를 통해서 은혜의 공급을 받아야 하는 분들입니다. 다른 사람들은 편하게 예배드리는데, 이 분들은 주방에서 예배시간에도 식사준비에 분주했던 것이지요. 그런 모습이 성경적이지 않아 그 제도를 고쳐서 예배에 집중하도록 하는데에는 상당한 시간과 갈등의 조정등이 있어야 했습니다. 체질을 바꾸는 문제였기 때문입니다. 교회에 오는 목적은 밥을 먹는 일이 아니라, 예배하는 것이 주된 일인데, 예배는 사라지고 밥먹는 일이 가장 중요한 교회의 사역이 되었다면 본말이 전도되었거나, 변질이 되었다고 할 수 밖에 없습니다. 개척을 하고 새롭게 교회를 시작해서도 같은 문제들이 늘 발생했습니다. 예배에 온 마음을 써야 하는데, 식사를 담당하시는 분들은 아무래도 성도들의 먹거리가 걱정이 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다 보니, 예배를 드리는 시간에도 온통 밥먹일 생각에 사로잡히거나, 예배를 마친 성도들이 혹시나 배가 고프도록 기다려야 하는 것이 신경쓰여서 예배가 다 마치기도 전에 봉사팀이 우르르 나가는 일들이 자주 일어났습니다. 그때마다 조정을 하고, 다짐을 하면서 변질되지 않도록 주의를 기울입니다만, 아마도 주방을 담당하는 분들에게는 쉬운 문제가 아닌것 같습 니다. 다시 분주하게 움직이게 됩니다. 그래서 드는 생각은 밥 먹는 시간을 좀 늦추면 안되겠느냐는 것입니다. 꼭 예배를 마치자 마자 먹어야 한다고 생각하지 말고, 조금 여유있게 기다렸다가, 그동안에 성도들의 교제를 통해서 사랑의 담소도 나누면 좋지 않을까요? 정 배가 고프면 교회 오기 전에 조금만 요기를 하고 오거나, 기다려주는 예의는 지켜주는 것이 옳은 일일 것입니다. 봉사하는 분들이 충분히 예배를 드리고 기쁜 마음으로 예배를 드릴 수 있도록 남을 배려하는 것 도 우리가 꼭 해야하는 일이 될 것입니다. 은혜로 채워져 기쁜 마음으로 봉사하면 더 오래, 힘들어도 이겨내며 할 수 있지만, 의무감으로 하게 되면 쉽게 지치고 나중에 더 어려운 일을 겪는 것을 보는 것은 자명한 일입니다. 주일학교에서도, 어른들 사이에서도, 이런 자그마한 배려는 교회를 더욱 건강하게 만들어가는 은혜로운 섬김입니다. 밥달라고 보채지 않고, 좀 늦게 먹으면 안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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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93
    아름다운교회 Oct 29.2023 정신 바짝 차리고...
    성경은 늘 우리에게 경고합니다. 시대가 악하니 주의해서 지혜롭게 살라고 말입니다. 세상말로 하자면 정신 바짝 차리라는 채찍질입니다. 어느 신문사에서 기자가 기사를 썼는데, 노인들이 병원에 입원하면 한달 뒤에 일어나는 일이라는 제목의 글이었습니다. 우리는 몸이 아프면 병원 신세를 집니다. 특별히 의료가 과분한 한국사회에서는 입원은 필수이고, 당연한 권리처럼 사용됩니다. 미국은 입원은 웬만하면 안시킵니다. 입원해도 그냥 빨리 퇴원시킵니다. 환자도 그런 추세입니다. 왜냐면 의료비가 너무 비싸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한국에선 정반대 현상이 일어납니다. 그래서 조금만 아파도 입원부터 하려고 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를 꼬집은 것일까요? 특히 노인들이 입원하게 되면 한달만 되어도 급격히 약화되고 심지어는 건강한 노인도 일찍 돌아가신다는 경고성 기사였습니다. 병원에 입원하면 근육이 급격히 감소되고, 그러면 침대에서 낙상하는 일이 생기게 되니, 병원에서는 소변줄 꽂고 침대에 누워만 있으라고 합니다. 대소변 받아내고 간병인에게 자신의 몸을 맡기며 살면 자존심이 상하고, 정신이 몽롱해 지면서, 소리를 지르게 되고, 그러면 정신질환으로 취급해서 약을 투여하며, 그러고 나면 몽롱해져서 멍하니 삶을 살다가 그냥 죽는다는 기사였습니다. 그래서 자녀들에게도 되도록 요양병원이나 입원은 시키지 말라고 당부를 합니다. 이 글을 읽으면서 정신이 바짝 들었습니다. 그렇게 늙어가는 삶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싶습니다.어찌 이것이 육신에 관한 것일까요? 영적인 건강에도 같은 원리가 작동된다는 것을 왜 우리는 애써 외면할까요? 우리의 육신의 건강을 위해서라면 우리는 별의별 것을 다 하려는 욕구가 있습니다. 요즘은 맨발걷기가 유행이라고 합니다. 한국에서는 열풍이 불고 있다고 합니다. 얼마 전 만난 목사님도 맨발걷기 전도사가 되어 입에 거품을 물고 나에게 권유를 했습니다. 일리가 있는 말이라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우리는 육신의 건강을 그렇게 도모하면서도 정작 영적인 건강을 위해서는 어떤 노력을 하고 있는 것일까요? 일주일에 한번 거의 '수동적으로' 예배에 참석하고 가는 것이 전부여서, 별도의 시간을 내어서 기도한다거나, 말씀을 읽는다거나, 기도모임이나 큐티모임등에 참여하지 않는 것이 보통의 신앙인들이 사는 모습일 것입니다. 그러한 것은 노인들이 요양병원에 입원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냥 종교생활에 그치게 되면서 소변줄, 대소변 기저귀에 보면서, 자신도 모르게 폐인처럼, 종교폐인이 되어가는 것을 모릅니다. 그러고 나면, 나중에는 내가 왜 믿고 사는지도 모르면서 그냥 일상의 예배에 시계추처럼 교회만 왔다갔다 하면서 나타나 보이는 여러 현상에 그저 울고 웃고, 분노하면서 종교의 주변을 걷돌고 사는 것이 보통의 신앙생활이 아닌가 싶습니다. 깨어나야 합니다. '잠자는 자여 깨어서 죽은 자 가운데서 일어나라' (엡 5:14) 권합니다. 자는 자에게는 자는 동안에 자기에게 일어나는 일이 무엇인지 알 수 없습니다. 자신이 죽은 해골가운데 산다는 것도 의식하지 못하고 삽니다. 그러니 깨어서 의식을 가지고, 그 주변을 살펴보라고 말합니다. 내일부터 제 15차 다니엘 특.새를 시작합니다. 정신차려야 하는 시간입니다. 깨어나는 시간입니다. 변하는 시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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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92
    아름다운교회 Oct 22.2023 땅을 보지 않고 하늘을 보는 사람
    작은 로마서라고 불리워지는 에베소서를 새벽말씀으로 묵상하고 있습니다. 이 서신서를 읽을수록, 그리고 깊게 음미할수록, 우리가 바라보고 있는 곳이 어디인지를 생각하게 됩니다. 사람들은 자기 최면의 덕에 비진리를 진리라고 믿고 사는 경향이 있습니다. 요즘같이 SNS등의 Social Media가 발달하고, 이제는 인공지능인 AI가 인간의 자리를 차고 들어오면서 ‘가짜뉴스’ 전쟁이 벌어지고 있는 시대에는 더더욱 그러합니다. 자기가 믿고 싶은 것을 믿으려는 성향이 강해지면서 그것이 진리이고 영원한 것이냐는 것은 이제 더 이상 중요한 것이 되지 못합니 다. 세상이 주입해주는 곳을 향해 달려가고 있을 뿐입니다. 이제는 AI 시대에 가짜 뉴스가 더더욱 기승을 부릴 것이라는 NYT 회장의 경고와 함께 그는 이런 시대에는 ‘묻고 또 물으라’고 조언을 합니다. 다시 말하자면 생각해 보라는 의미 입니다. 아무런 비판없이 세상이 주는 것을 받아 먹다가 보면 나도 모르게 그 방향으로 걷고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러한 것중에 ‘복(福)’이라는 개념이 있습니다. 우리는 대체로 ‘복’ 하면, ‘물질/돈’으로 생각합니다. 그런데 에베소서 1장에 와서 바울은 우리가 ‘복’을 받은 자인데, 작게 받은 것도 아니고, 넘치도록 받았다고 합니다. 그것은 ‘하늘에 속한 신령한 복’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좋아하지 않습니다. 100만불을 받았다고 하면 심장마비가 올 정도로 벅찬 기쁨이 있는데, 이미 받은 이 ‘신령한 복’을 그렇게 많이 받고도 감각이 없습니다. 다시 말하자면 구원의 기쁨이 없다는 말입니다. 왜 그럴까요? 그 가치를 모르기 때문 입니다. 성도(聖徒), Christian이라고 불리워지는 이들은 기본적으로 이 기쁨을 바탕으로 합니다. 구원의 기쁨은 죄용서라는 회개의 샘에서 올라오는 것입니다. 사죄함의 기쁨이 없으니 구원의 기쁨이 무엇인지 알 길이 없는 것입니다. 무엇으로부터 구원입니까? ‘영원한 죽음’으로부터의 구원입니다. 구사일생(九死一生)이라는 말을 하지 않습니까? 요즘 이스라엘과 하마스와의 전쟁통에 대한민국 국민들이 이스라엘을 탈출하는 비행기에 올라 안도의 눈물을 흘리는 것을 봅니다. 그냥 비행기를 타고 왔더라면 그런 감격은 없을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전쟁통에서 겨우 살아남을 수 있는 위험에서 피해왔기에 같은 비행기를 타도 감동이 다른 것 입니다. 마치 그런 것과 같습니다. 우리의 구원의 기쁨은, 내가 얼마나 위험한 곳에서 구출받았느냐는 감격입니다. 신자, 성도, 그리스도인이라면 바로 이 감격에서부터 출발하는 것입니다. ‘하늘의 신령한 모든 복’보다는 땅의 열매인 ‘돈 맛’을 본 우리들은 하늘의 신령한 복의 의미를 인정하지 못합니다. 땅만 바라보고 살았기 때문입니다. 이 땅의 소산물만 먹고 살았기 때문에 하늘에서 오는 것이 무엇인지를 모르고 삽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 40년을 지나고 가나안 땅의 첫 소산물을 먹으면서 ‘만나’는 더 이상 그들의 음식이 아니었습니다. 이 후의 세대는 ‘만나’를 알지 못합니다. 전래동화처럼 전해들은 소식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광야 시대에 ‘만나’를 먹은 백성들은 그 맛을 기억합니다. 그 감동과 감격을 기억합니다. 오늘 우리 시대에, 하나님께서는 ‘하늘의 신령한 복(만나)’를 경험하게 하셨습니다. 성령을 통해서입니다. 하늘의 것을 보려면 성령님을 통하지 않고서는 알 길이 없습니다. 이번 다니엘 특.새를 통해서 그 맛을 볼 수 있기를 고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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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91
    아름다운교회 Oct 15.2023 손바닥은 마주쳐야 소리가 난다
    박수는 두 손이 마주쳐야 소리가 납니다. 한 손으로 아무리 빠르고 세게 친다 해도 다른 한 손이 마주쳐주지 않으면 그냥 파리잡는 손바닥이 됩니다. 공허하다, 이 말입니다. 예수님도 그런 말씀을  하신  적이  있으십니다. ‘아무리  피리를 불어도 춤을  추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춤을  추라고  피리를  부는데도  춤추는 이가 없으니 무슨 흥이 나겠습니까? 성장하고 화목한 교회들을 살펴보면, 박수 소리가  크게  난다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강단에서 아무리 외쳐 봐도 강단 아래서 움직여주지 않는다면, 그 강단의 메시지와 외침은 허공을 가르는 메아리에 지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강단에서 들려지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온 성도들이 힘을 합하여 한 방향으로  나간다면, 우레와  같은  갈채가  쏟아집니다. 그만큼 열정과 열심 그리고 헌신적으로 한 방향으로 나가기 때문입니다. 이제 우리 교회가 다니엘 특.새로는 15년째, 그리고 VVIP 새가족잔치는 두 번 째의 행사를 맞이했습니다. 나름대로 기도하고 목표를 삼고 전심전력으로 뛰어가는데 박수소리가 나지 않는다면 참 난감한 일일 것입니다. 그런데 어느 집사님이 교회로  찾아왔습니다. 목사님이 광고에 새가족 운동을 펼친다고 해서  주변을 찾아보니, 아주 오래전에 알던 사람이 떠올라 그분과 함께 식사를 하다가 교회가 는 것을 권면했더니, 당장 교회를 가보자고 해서 평일에 모시고 왔다는 것입니다. 참, 감사하다는 마음이 생겼습니다. 위로가 되었고, 소망이 생겼습니다. 교회가 무슨 행사를 하든, 나와는 상관없다는 듯 지나는 사람들이 아니라, 이 일이 내 일이고, 내 가족의 일이며, 하나님의 일이라는 의식 속에 자그마한 힘을 보태 겠다고 하는 그 마음이 너무나 아름다웠습니다. 특.새를 한다고 하니, 우리 이번 집회에 한번 같이 해보자고 서로에게 권면하는 모습을 보는 것도 마음에 감동을 주는 일입니다. 한번은 어느 집사님이 교회에 나온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우연한 기회에 수요영성 예배에 참석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두 가지 때문에 깜짝 놀랐다고 합니다. 하나는 참여하는 사람들이 몇 사람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본인 외에 모든 교인들이 참여하고 있을 줄 알았더니, 그렇지 않은 모습을 보면서, ‘목사님이  불쌍하게  보였다’고 합니다. 또 하나가  놀란 것은 그 작은 숫자에도 불구하고 목사님이 혼신의 힘을 다해서 마치 주일 설교를 하듯 하는 모습에 놀랐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자신들이라도 열심히 나가자, 그래야 목사 님이 힘을 낼 것이 아니냐고 부부가 힘을 합했다고 합니다. 그리고선 자신들이 권할 수 있는 주변의 사람들에게 수요영성 예배에 나가보니 너무나 좋다고 권하기 시작했습니다. 사실 이런 분들이 목회자가 한쪽 손뼉을 휘둘 때에, 다른 손을 마주 대하여 소리나게 하는 분들입니다. 그런 사람들이 많아질 때, 교회는 은혜가 넘치고 부흥의 불길이 붙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반대로, 마주치는 손이 없으면 교회는 공허함 때문에 목회자는 힘을 잃고, 교회는 능력을 상실하고, 그저 그런 교회로 전락해 버리는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목사가 측은해 보여도 좋습니다. 동기가 그랬다 하더라도 예배에 와서 함께 은혜를 받으면 하나님이 그 모습을 사용하셨을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교회안에서는 박수소리, 아니 갈채, 우레와 같은 소리가 나야 합니다. 그것이 부흥의 소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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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90
    아름다운교회 Oct 08.2023 개구멍을 막아라
    교회에 강아지들이 살고 있습니다. 제가 개인적으로 개들을 좋아하기 때문에 기르는 것이지만, 부수적으로 교회에 유익이 되는 점도 있기 때문입니다.  (혹시 교회돈으로 강아지들을 기른다고 오해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제 개인 경비로 개들을 기르고 있습니다.)  개들이 있어서 좋은 것은, 우선 교회가 주거지가 아니기 때문에 혹시 있을 도둑을 예방합니다. 지금까지 옆 교회, 옆 집들이 도둑들이 들어서 피해를 본적이 있습니다만, 우리 교회는 지난 10년동안 한번도 도둑이 들지 않았습니다. 두 마리 큰 개가 컹! 짖기만해도 우람찬 소리에 위협이 될만하기 때문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이 개들은 한국 사람을 봐서는 절대로 짖지 않고 외국인을 향해서만 짖는다는 것이지요. 또한 정서적으로도 강아지들을 좋아하는 아이들에게도 친근감을 주기도 합니다.  뭐, 이런 이유들로 개들을 기르고 있습니다만, 늘 좋을 수만 없습니다. 개들이 커서 얼마나 담을 뛰어넘는지, 수시로 집을 나가서 주변 사람들에게 데리고 가라고 전화가 오는데,  새벽이고 밤이고 구분이 없습니다. 그래서 여간 신경쓰이는 것이 아닙니다. 이제는 담을 높여서 빠져 나갈 수 없을 정도가 되었기에 그렇지 않지만, 요즘은 어떻게 개들이 발견했는지, 개구멍을 통해서 도망간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희안합니다. 그 조그만 구멍, 저기로 드나들 수 없을 것 같은데도 나중에 CCTV 확인해보면 그 조그마한 개구멍으로 힘을 다하여 빠져나가는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이 개들은 틈만 있으면 어떻게든 찾아내서 도망갑니다. 개구멍, 개들에게만 있는 것은 아니고 사람들에게도 있습니다. 울타리안에만 있으면 훨씬 안전한데도 개들은 왜 그렇게 울타리를 넘어서 뛰어나가고 싶은지 모릅니다. 뒷마당이 훨씬 넓고 좋은데도 거기에 만족하지 않고 일단 담을 넘으면 기회는 이때다 싶은 듯이, 쏜살같이 뛰어나갑니다. 우리에게도 그런 성향이 있다는 것을 발견합니다. 인류 최초의 에덴동산에서도 있었지요 사탄은 하와의 마음 에 의심을 심어주었습니다. ‘보암직도 하고, 먹음직 하기도 한 탐스런 그 성향’입니다. 평상시에는 아무렇지 않다가도 어느 순간에 우리를 죄의 탐욕으로 끌고가는, 여러 막을 쳐놓았음에도 불구하고 (도덕, 율법, 양심등의 울타리), 순간 탐욕의 구멍이 보이면 언제든 그 구멍을 통하여 달아나고야 마는 우리 안의 ‘죄의 속성’이 있다는 것을 우리는 모르지 않습니다. 그 개구멍을 막아야 합니다. 죄로 통하는 통로를 막아야 안전합니다. 일순간은 아쉬운 마음도 있을 것입니다. 짜릿 하고, 쾌감을 느낄 삶의 기쁨을 잊어야 하는 고통도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 그것은 ‘개구멍’입니다. 그것을 막아야 우리가 주님과의 교제를 이어갈 수 있습니다. 우리가 그 개구멍을 통하여 세상으로 달려갈 때에 주님과의 사귐은 끊어지게 됩니다. 그러한 것이 어디 신앙생활에만 있겠습니까? ‘관계’에서도 마찬가지입니 다. 교회안에서는 성도, 목회자, 여러 지체들과의 관계에 ‘개구멍’이 생길 때, 그 관계가 어려워집니다. 가정에서 부부와 자녀, 부모들과의 관계에서도 ‘개구멍’이 관계를 망치게 합니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이만하면 됐다하는 안정감이 자리 잡을 때에 우리 안에 있는 그 ‘성향’이 반드시 ‘구멍’을 찾아내지 않도록 우리는 관리해야 합니다. 늘 주안에 머무르는 훈련이 습관처럼 되어있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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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름다운교회 Oct 01.2023 휩쓸려 살지 않기
    살다가 보면 별의 별일을 겪게 되는 것이 인생입니다. 원하는 일들뿐만 아니라 원치 않은 일까지도 보너스처럼 생기는 것이 알다 모를 인생입니다. 불규칙하고, 불투명한 인생을 살아가는 방법은 참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무엇인가에 몰두하기도 하고, 나름대로 열심히 살기도 하지요. 하지만, 우리가 주어진 짧은 인생을 살면서 정말 ‘의미있게’ 살고 있는 것인지 생각해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시편의 기자도 ‘우리 인생을 헤아릴 수 있는 지혜를 달라’고 기도하였던 것처럼, 우리는 어느 시점에 서면 그 존재의미를 되새김질 해야만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그냥 시간을 흘려보내지 않고, 때와 시기를 분별하면서 지혜롭게 살 것을 명령하십니다. 세월을 아끼고,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라고 하십니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그렇게 말씀하시는 대로 순종하며 사는 것보다는 적당히 흘러가면서, 아니, 좀더 적나라하게 표현한다면 삶에 ‘휩쓸려’ 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냥 주위에서 일어나는 상황에 적응하면서, ‘열심히’ 산다고 하는데도 사실은 그 분위기에 휩싸여 사는 것입니다. ‘세상의 풍조’에 아무런 비판없이, 세상이 제시하는 가치기준에 맞추어 살려고 달려가는 것 역시 ‘휩쓸려’ 사는 것의 형태일 수 있습니다. 저는 요즘 그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나도 모르게 세상에 휩싸여 살았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지요. 그중의 하나가 ‘News paper’입니다. 그것이 인터넷이든 무엇이든, 세상을 보는 창구라고 여기면서 나도 모르게 주위에서 일어나는 이런 저런 일들을 뒤적이고 있다는 것을 자각하게 된 것입니다. 그것 때문에 염려도 생기고, 분노도 생기고, 비판도 생기는 것을 알게 된 것이지요. 그런데 요즘 그런 것들을 끊었습니다. 세상과 담을 쌓아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너무 그것들에게 마음을 빼앗기는 것이 문제일 것입니다. 마음을 빼앗기니까 시간과 인생의 방향 이 상황과 감정에 쉽게 흔들리는 것을 발견하였습니다. 이것들을 끊어내니 훨씬 한 곳으로 집중할 수 있었습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라’(롬 12:2)고 하십니다. 이 말씀은 일어나는 상황에 따라서 일희일비(一喜一悲)하면서 살지 않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상황에 따라서 감정과 결정이 바뀌는 우(愚)를 범하기 때문입니다. 감정에 휩쓸리고, 여론에 휩쓸리고, 주위의 의견에 휩쓸려 사는 것이 아닌, 하나님의 뜻에 의해서 내 삶의 방향이 결정되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세상을 본받지 않으려는’ 세심함이 필요합니다. 정신 줄을 놓고 살다가 보면, 나도 모르게 세상의 가치관에 휩싸여 나도 그들과 같이 되려는 욕구에 아무런 비판도 없이 따라가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에 들어가서 그들을 전멸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우리는 이 대목에 와서 하나님의 잔인함에 놀라기도 하고, 어떤 이들은 비판하기도 합니다. 너무 하는 것 아니냐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지 않다는 것을 발견하는 것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습니다. 사사기에 들어서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들을 전멸시키거나, 쫓아내지 못함으로 인해 하나님을 떠나서 그들의 토착신들(바알과 아세라, 몰록등)을 섬기게 됩니다. 이로 인해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의 강력한 심판에 직면하게 됩니다. 휩싸여 살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분별하며 살기를 힘써야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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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름다운교회 Sep 24.2023 노인, 천덕 꾸러기 인가?
    인생에 cycle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태어나서 사랑받고 보호받고 살다가, 청/장 년이 되어 자립하다가, 누구나 가는 노인의 길에 접어들어 보호를 받다가 주님의 나라에 이사 가는 싸이클입니다. 보호받고, 성장하고, 쇠퇴하는 과정을 누구나가 밟게 됩니다만 그것은 자연스러운 인간의 이치요, 하나님의 정하신 법칙이며, 인생의 순리(順理)입니다. 자녀를 낳아서 마음껏 마음과 몸을 들여 사랑해 주다가, 이젠 나이가 들면 모든 힘이 다 쇠진해져서 보호해 줬던 대상(자녀들)에게 이젠 보호받는 이 놀라운 인륜의 법칙이 존재하는 것입니다. 과거에는 이것이 ‘사랑과 효도’라는 이름으로 자연스럽게 인간의 삶에 녹아져 내려온 문화요, 관습 이며 정신세계였는데, 핵가족 시대를 거치며 이 순리(順理) 역시 거추장스러운 것이 되어감을 느낍니다. 그만큼 세대간의 단절이 심하고, 과거 전통적인 개념이 바뀌는 것이 당연한 세상이 되다가 보니, 마음껏 보살펴 주었던 자녀들로부터 외면을 당하는 노인들이 점점 많아지고, 노인들은 아파하고 가슴앓이를 하며 ‘천덕꾸러기’ 신세됨을 한탄하는 일들이 주변에 많아지고 있음을 봅니다. 물론 그렇지 않은 분들도 있습니다만, 전반적인 기류는 그렇게 받아들여야 할 것입니 다. 노인, 요즘은 양극단으로 설명합니다. 미국을 비롯한 세계 경제가 어려워지다 보니, baby boomer 세대가 노령기로 접어들면서 이들이 경제 주체요(젊은이들은 돈이 없기에) 가진 현금으로 더 많은 기회(?)를 누릴 수 있다고 합니다만, 이것은 한쪽의 극단이고, 다른 극단은 돈없는 노인들이 받는 설움이 대부분이지요. 이제 저도 노인의 세대로 들어오면서 은퇴를 목전에 두고 있기에 나름대로 은퇴를 계획하다가 발견한 것이 있습니다. 노인들이 여기저기에서 ‘천덕꾸러기 신세’가 되는 시점은 ‘은퇴를 하고 수입이 없고, 나이가 들어 스스로 운전도 할 수 없어 남의 신세를 지게 될 때’가 바로 그런 시점이라는 것입니다. 마냥 효도에 기대어 살 수는 없기에 준비된 삶을 살지 않으면 정말 고통스러운 노인 세대를 바라보는 우리들의 인식이 달라져야 하는 것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그것은 그분들을 돌보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명령’이요, 우리 역시 그 ‘천덕꾸러기’가 되어야 하는 당연한 진리입니다. 더더구나 가만히 더 깊이 생각해 보면, 이 ‘천덕꾸러기’ 노인 세대들 때문에 나라와 가정이 세워졌고, 심지어 교회역시 코로나 시대에도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이 노인 세대가 굳건하게 교회를 지켰기 때문입니다. 젊은 세대들이 교회를 외면하고 떠날 때, 노인 세대는 없는 살림과 경제력으로 목숨처럼 여기는 십일조 생활, 감사와 선교와 건축과 각종 봉사하는 일에 목숨을 거는 분들이었기에 교회는 그 어려운 시간속에서도 버티고 이길 수 있었다는 분석이 설득력을 얻고 있습니다. 그동안 간과하고 있었 던 것 중의 하나가, 이 노인 세대가 정말 위대하다는 것입니다. 고갈되는 건강과 경제력에도 불구하고 교회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여러 섬김과 봉사에 열심히 참여하는 노인세대, 이러한 은퇴세대에 정말 뜨거운 박수를 보내고 싶습니다. 감히 젊은 세대가 흉내내지 못할 헌신과 열정으로 없는 살림에서도 열심을 내던 그 분들이 정말 위대하다 아니할 수가 없습니다. 그 분들은 천덕꾸러기가 아닌 영웅들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감사함으로 다시 바라보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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