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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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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름다운교회 Mar 25.2018 쿼바디스 도미네(Quo Vadis Domine)
    학창시절에 감명깊게 본 기독교 영화는 ‘궈바디스 도미네?’ (Quo Vadis, Domine?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였습니다. 수십년이 지난 지금도 몇 장면이 기억에 남기도 합니다. 이 작품은 1896년에 노벨 문학상을 받은 폴란드 작가에 의해서 씌여진 소설을 바탕으로 여러차례 remake되면서 기독교인들의 사랑을 받아온 영화입니다. 그 속에서 베드로는 네로의 핍박을 피해서 로마로부터 빠져 나오는 길목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납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붙잡고 물었습니다. ‘주여, 어디 가시나요?’ 주님은 베드로에게 ‘네가 십자가를 지지 않기 위해 도망가는 로마로 다시 한 번 십자가를 지러간다’고 하십니다. 베드로는 결국 로마로 돌아가 순교합니다.기독교는 행복의 종교일까요, 불행의 종교일까요? 축복의 종교일까요 고난의 종교일까요? 두 가지 다 어떤 의미에서는 다 맞는 이야기입니다. 신앙생활을 처음 시작하는 분들이 늘 고민하는 것들이 있습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이 참 부자유스럽고, 고통스러운 것이다’는 말입니다. 인간의 욕구는 자기가 믿는 종교를 통하여 해탈이나 행복 그리고 자아실현을 목적으로 삼고자 합니다. 그래서 종교가 우리 인생을 행복해준다고 믿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그리스 아테네를 방문하였을 때에 그 사람들을 향하여 이렇게 외쳤습니다. “여러분들은 참으로 종교성이많습니다” (행17:22). 이 말은 어찌 그리스 사람들 뿐이겠습니까? 우리 모든 인간의 저 심성에는 종교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흙으로 만드셨지만 그 안에 ‘영’(spirit)을 불어 넣으셨기 때문이지요. 하지만 그러한 종교심을 가지고 신앙생활을 하다가는 기독교의 본질을 이해하지 못하고 변질되는 것은 시간문제입니다. 우리가 믿는 세계는 이 세상에서 행복하게 살기 위함이 아닙니다. 이 땅에서 잘 먹고 잘 살고, 고민을 해결하고, 행복하게 살기 위함이 아닙니다. 참된 행복은 소유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관계’에서 나오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늘 베드로와 같습니다. 어려운 짐은 피하고 싶습니다. 시간이 들고, 돈들고, 노력을 필요로 하는 것은 되도록 하고 싶어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세상의 법칙도 노력 없이, 피땀 흘리지 않고 성공을 보장하지 않는 것처럼, 은혜로(공짜로), 아무 댓가도 없이 구원을 받았지만, 구원받은 자로서 이 땅에서 산다는 것은 그리 녹녹하지 않습니다. 말씀에 합당하게 살기 위하여 고난을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빌1:29). 그런데 우리는 그 고난을 피하려고 합니다. 베드로처럼 핍박이 있는 로마는 도망가고 싶습니다. 우리가 십자가를 지지 않으려 하면 주님은 다시 우리 대신 십자가를 지십니다. 우리가 피하면 주님은 다시 들어가십니다. 말씀대로 신앙생활한다는 것은 어쩌면 고통스러운 일입니다. 내면의 육의 자유를 억압해야 하는 일이 빈번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주님께 매임은 또 다른 행복입니다. 세상에 수많은 남자와 여자가 있어도 한 사람에게 종속된다는 것이 말할 수 없는 기쁨이 있기에 결혼을 택하는 것과 같을 것입니다. 주님께 속한다는 것은 자유를 억압당하는 것이 아니라, 참된 행복을 누리는 것입니다. ‘궈바디스, 도미네?’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 다시 한번 그 영화를 보고 싶습니다. 순교시대의 사랑은 이렇게 목숨을 주고 받은 사랑이었습니다. 내게 그 사랑이 있는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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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름다운교회 Mar 18.2018 Frame work
    지식과 정보의 전달이 정말 빠르게 움직이는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그만큼 세계가 가까워지고 있기도 하지만, 다니엘의 예언처럼 마지막 때를 실감하기도 합니다. 이런 세상에서 좋은 정보가 세상이 발전해 갈 수 있는 환경을 제공하기도 하지만, 너무나 빠르고 홍수처럼 쏟아지는 정보들의 오, 남용과 위험성 또한 존재하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래서 중요한 것이 어떤 ‘관점(view point)’으로 판단하고 접근하느냐 입니다. 우리는 어떤 ‘고정관념’이나, ‘신념’ ‘관점’등 각자 다른 삶의 방식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좌,우파의 진영논리에 갇히면 세상은 다 그것으로 보입니다. 내게 어떤 관점이 생기면 다 그 관점으로 판단하고 해석하게 됩니다. 그것을 저는 “Frame work”이라고 부르고 싶습니다. 어떤 frame으로 볼 것이냐는 자신이 가진 고유의 결정이며, 삶의 방향과 같은 것입니다. 그래서 건강한 frame을 갖는 것은 참으로 중요합니다. 마음이 병들면 대체적으로 생각도 병듭니다. 잘못된 가치관이나 고정관념 혹은 신념들이 생기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한동안 제게도 그러한 아픔이 있었습니다. 일단 한 frame이 씌워지니까 모든 관점이 그것으로 통합니다. 그런 관점으로 해석하고 판단해 보니, ‘아, 맞아 그래서 그랬어? 그러고 보니까 정말 그러네?’ 수많은 상상과 일들이 그 frame에 맞게 형성되었습니다. 진실이 무엇이냐는 소용이 없습니다. 그 frame work 때문에 인생의 소중한 것들을 잃기도 했습니다.이러한 것은 세상살이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신앙생활 가운데도 작동하는 원리입니다. 특별히 관계가 중요시되는 공동체와 신앙생활에서는 정말 중요합니다. 이 프레임이 건강해야 하고, 옳아야 하고, 은혜가 되어야 합니다. 이 frame이 고장이 나면, 수많은 바이러스가 침투해서 제대로 된 관계를 유지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도 성경적이고 신앙적인 건강한 프레임이 형성되지 않으면 신앙생활 자체가 불가능해집니다. 하나님이 그런 프레임으로 갇혀 보이기 때문입니다. 교회, 목장생활의 관계도 그렇습니다. 참으로 감사한 것은 우리에게는 ‘은혜’라는 프레임을 하나님께서 입혀 주셨습니다. 죄인들이 값없이 주 앞에 나와서 용서받고 지식에까지 새롭게 된 새 피조물의 삶을 허락해 주셨습니다. 그래서 나를 바라보고 이웃을 바라보는 그 프레임은 바로 ‘은혜’입니다. 그 은혜를 받으니 세상의 모든 프레임이 바뀌어 집니다. 바뀌어 진 프레임으로 보니, 세상이 달라지고, 교회가 달라지고, 이웃이 달라지고, 가족이 달라져 보입니다. 은혜의 세계가 열린 것이지요. 용서가 자연스러워지고, 용납이 가능해지며, 격려와 사랑의 세계가 열려지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런데 그 프레임이 온갖 세상의 비바람에 의해서 녹슬고, 흐려지고, 잃어질 때가 있습니다. 그것은 남들 때문이 아닙니다. 세상 때문도 아닙니다. 문제와 답은 다른 곳에 있지 않았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데 그것은 바로 ‘나 자신’이라는 것입니다. 이 ‘은혜 Frame’이 작동을 안 하는 것입니다. 잃어버린 것입니다. 우리는 그 원인이 다른 곳에 있다고 지목합니다. 그러나 곰곰이 생각해 보십시오. 그것은 다른 곳에 있지 않고, 나 자신에게 있었음을 깨닫게 됩니다. Frame이 잘못되었습니까? 녹슬었습니까? 은혜 프레임이 작동을 안 합니까? 그래서 속상합니까? 주님 앞에서 씻어내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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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름다운교회 Mar 11.2018 선물 받았나요?
    선물은 우리를 기분 좋게 합니다. 기분을 좋게 할 뿐만 아니라 때론 팍팍한 삶에 참된 용기도 주고, 사랑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배우기도 합니다. 제가 살아오면서 참으로 저는 과분한 많은 사랑과 선물을 받아 왔다는 것을 회상해봅니다. 그 사랑의 선물들은 삶의 의지를 북돋우기도 했고,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과분한 것인지를 생각하게도 했으며, 선물은 삶의 가치와 용기 그리고 더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좋은 동기도 되었습니다. 그리고 때론 선물들이 나에게 머문 것이 아니라 다른 이들에게도 나눌 수 있는 넉넉함도 되어 사람을 세우는 일에도 사용되기도 했습니다. 참으로 선물의 가치가 무궁무진합니다 (여기서는 선물의 오용과 부정적 개념은 제외합니다). 선물은 사람 사이를 따뜻하게 만들어 주는 가교역할도 합니다. 작은 선물이 다른 사람에게 큰 삶의 용기를 주게 될 때에 가장 큰 보람을 느끼기도 합니다. 이처럼 선물은 참으로 유익한 것입니다.하지만 우리가 잊은 선물도 있습니다. 요즘 우리 교우들의 자녀들이 맞이하는 백일, 돌, 생일들을 치루어내는 부모님들의 애정이 넘치는 수고와 사랑의 이야기를 듣고 보면서 참, 자녀들은 행복하겠다는 생각이 많이 듭니다. 제가 기억은 하지 못하지만 저의 부모님도 그 시대에 할 수 있는 모든 사랑과 정성으로 사랑을 다해 주셨을 것을 의심치 않습니다. 그런데 그 자녀들이 나이가 들어 부모님의 사랑을 잊은 것을 보면 참으로 가슴이 먹먹하고 안타깝습니다. 마치 그들은 부모로부터 사랑을 받아보지 못한 것처럼 말하고 행동을 합니다. 부모의 사랑이 부족했다고 말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정말 그럴까요? 잊었기 때문이지요. 우리는 수많은 사람들에게서 받은 선물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많은 선물들이 안타깝게도 시간과 무심의 공간속에 버려진 것을 깨닫지 못하고 삽니다.우리가 받은 선물 중에 가장 큰 선물은 구원의 선물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생명을 십자가에 쏟아 부으심으로 자신은 죽고 우리를 살리신 선물을 받았습니다.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으니, 이것이 너희에게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엡2:9)고 하셨습니다. 이 선물을 받아들고 얼마나 감격했는지 모릅니다. 울었고, 기뻤고, 감동했고, 결단했습니다. 그 선물이 너무나 고마워 ‘내 생명도 주님을 위해 드립니다’고 고백하기도 했습니다. 그 하나님의 선물이 얼마나 놀랍고 신비한지요. 어떤 사람은 그 선물을 받아들고 주님께 사랑을 고백하는 분들도 있지만 참으로 많은 사람들이 그 선물을 받아들고도 아무런 느낌이 없이 살아갑니다. 이미 많은 사랑과 선물을 받았음에도 마치 아무것도 받지 않은 양, 그저 담담하게 살아가며 종교생활에 머무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교회는 구원받은 하나님의 사람들이 모이는 곳입니다. 그런데 구원받은 것을 알지도 못한 채, 교회 다니는 사람들, ‘형제인 척’하는 사람들이 교회 안에 들어와서 가장 큰 구원의 감격으로 이루어진 공동체를 소망 없게 만드는 것이 사탄의 전략이라는 것을 교회는 몰랐습니다. 숫자가 늘어나는 것을 기뻐하지 말고, 한 사람이 회개하고 주님께 돌아오는 것을 기뻐하는 우리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선물을 받은 공동체이기 때문입니다. 당신은 그 하나님의 선물을 받으셨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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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9
    아름다운교회 Mar 04.2018 교회 사랑
    오늘은 우리 아름다운 교회가 창립한지 9주년을 맞이합니다. 9년을 지나 이제는 10년차를 맞이하는 것이지요. 십년이면 강산이 변한다고 했는데, 달려온 길과 목회환경을 생각해보면 강산이 변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 같습니다. 가정 집에서 시작한 아름다운 교회, 이름도 없었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그 첫 모임의 감격을 생각해 봅니다. 아픈 가슴을 가지고 교회를 시작하였기에 그 심정에 많은 교차점들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마켓 시절을 지나, 비록 창고 건물이지만 우리만의 예배공간을 가졌다고 결정되었을 때, 그곳을 하루라도 빨리 보고 싶어서 저녁 늦은 시간에 성도들이 모여서 정해진 장소에 가서 환호했던 감동스러운 일을 추억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닐 것 같습니다. 그야말로 무(無), zero base에서 이룬 기적적인 일들을 열거하자면 지면이 부족할 것입니다. 개척 한지 4년 6개월만에 하나님은 다시 현재의 땅과 예배당을 주셔서 무일푼에서 넓은 대지와 건물을 가진, 자체 교회를 가지게 된 때에 하나님의 기적을 보는 듯 하였습니다. Escrow가 끝나지도 않아 우리 땅도 아닌 이곳에 와서 수도와 전기가 끊겨서 죽어가는 나무들이 아까워, 우리의 건물이 될지 안 될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믿음으로 물을 길어 나르며 나무를 살리는 무모한(?) 믿음도 발휘해 보았습니다. 아무 것도 없었지만, 개척할 때도 무일푼이었고, 이 건물을 매입할 때도 무일푼이었는데도 하나님은 참으로 많은 것을 주셨습니다. 그저 우리는 믿고 여기까지 왔을 뿐인데, 하나님은 선한 뜻을 품은 우리에게 기회를 주셨습니다. 이런 간증을 하려면 시간이 부족할 것입니다. 하나님이 허락하신 이 아름다운 교회, 우리가 사랑하는 것은 당연합니다.예수님의 마음은 온통 ‘내 몸’(my body)이라고 이야기하시는 ‘교회’에 마음을 가지셨습니다. 십자가의 핏값으로 교회를 세웠습니다. 그리고 그 교회를 예수님은 사랑하셨습니다. 도대체 교회가 무엇이기에 당신의 핏값으로 지불할 만한 가치가 있단 말입니까? 주님이 사랑하셨던 그 교회, 정말 우리도 사랑하는 것일까요? 이민 생활을 하다가 보니, 자의든 타의든 교회를 옮겨 다니는 습성(?)이 있는 사람들로 교회가 이루어지니, 교회는 그저 언젠가 떠날 준비를 하고 있는 사람들로 가득 차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조금만 마음이 어렵고, 고통이 찾아오면 너무나 쉽게 교회를 떠나는 습관이 이민자들에게 있는 것 같습니다. 마치 고국을 등지고 이민 길에 오른 것처럼 말이지요. 그러다 보니, 언제 떠날지 모르는 교회에 무슨 애정이 있을까 싶습니다. 그러한 교회를 주님은 자기 생명을 주고서 사랑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교회가 되라고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단지 교회를 다니라고, 교회로 부르신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우리가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그 각오를 하는 것이 교회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는 지금까지 하나님의 은혜와 이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믿음과 성령으로 지켜낸 교회입니다. 그 사랑의 표현 방법이 여러 가지이지만, 나름대로 예수님을 사랑하며 이 교회를 사랑하며 교회 생활을 하게 됩니다. 교회를 사랑하는 많은 길이 있습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모이는 것’입니다. 모인다는 것은 함께 간다는 표현입니다. 그것이 사랑의 첫 단추입니다. 교회가 되라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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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름다운교회 Feb 25.2018 아름다운 경주
    2018 평창 올림픽이 막바지에 이르고 있습니다. 여러 가지 우려 속에서 열린 올림픽이 우리 민족의 가슴에 시원함을 주었으면 좋겠습니다. 금메달을 몇 개나 땄느냐에 따라서 매겨지는 순위가 있는가 하면, 그냥 메달 개수로 순위를 매기는 방법도 있다고 합니다. 금메달을 따야만 선수대접을 받고, 인기가 없거나 메달을 목에 걸지 못하면 많은 사람들의 관심 밖으로 사라지며 눈물을 흘리는 사람이 대부분일 것입니다. 그러나 생각해 보면, 수많은 경쟁들을 물리치고 올림픽에 출전할 정도의 실력을 갖춘 것만으로도 충분히 영광이 아닐까 싶습니다. 올림픽에 나오는 것 자체가 이미 세계적인 선수, 정상급의 선수들인 것이지요. 불과 몇 초가 등위를 결정하는 것이니 실력차도 대동소이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절대적인 승자와 패자가 없을 만큼 실력들이 많이 좋아졌다는 의미일 것입니다. 어제의 무명선수들이 오늘 메달을 따기도 하는 것을 보면 말이지요. 여기까지 오기까지 얼마나 많은 수고와 땀을 흘리며, 수많은 사연들이 있을까 생각해 보면, 한 사람, 한 사람 칭찬해 주고 싶습니다. 어느 선수가 금메달을 따고서 이렇게 소원했다고 합니다. “오늘은 마음 놓고 라면에 밥 말아 먹고 싶다‘고 말했습니다. 그만큼 고강도의 훈련을 받느라 항상 절제를 해 오는, 그야말로 인간기계와 같은 삶을 산 선수들이 참으로 안쓰러워 보이기도 하고, 부러워 보이기도 합니다. 그들의 수고와 노력을 칭찬하고 싶습니다.성경은 우리에게도 같은 삶의 pattern을 요구합니다. 즉, 경기하는 삶입니다. 바울은 그리스도인의 삶을 ‘경기하는 사람’에 비유하고 있고, 히브리서 기자는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한다(히12:1)’고 말하고 있습니다. 경주, 경기, 이 당시에 이러한 경기는 마치 올림픽 경기와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는 스케이팅 강국입니다. 쇼트트랙 선수에서 스피드 스케이팅 선수로 전환한 이승훈이라는 선수는 나이가 적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어린 10대의 아이들과 함께 성실하게 훈련을 하는 것으로 유명하다고 합니다. 이 선수는 알람이 필요 없을 정도로 정확하고 자기 절제가 강한 선수입니다. 새벽 5시에 기상하여 밥 먹고 잠자는 시간을 빼고는 하루 11~12시간동안을 훈련했다고 합니다. 본인도 그 삶을 지겹다고 표현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쉴지라도 운동장에 나와서 쉴 정도로 연습을 부단히 한다고 합니다. 이승훈 선수는 한국이 자랑하는 선수입니다. 이것이 어찌 이 한 사람의 경우이겠습니까? 수많은 선수들이 자기의 한계를 극복하고, 정상에 서기 위해 끝없는 노력을 하는 것을 보면서 참 부끄럽다는 생각이 드는 것은 왜일까요? 우리는 그 정도로 열심히 믿음의 경주를 준비하고 있는지, 이리 저리 엎어지는 것을 당연시 하면서 우리의 실패를 자위(自慰)하면서 자기연민에 사로잡혀 사는 연약한 우리의 모습과 상당히 비교가 되었습니다. 우리도 믿음의 경주를 잘 해야 합니다. 올림픽 선수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도 해야 합니다. 주님이 오실 그 날이 우리 성도의 믿음 올림픽 폐회식이 될 것입니다. 조금씩 흐트러지기 쉬운 우리 삶을 추스르고, 주님이 주실 상을 위하여 하루 한 걸음, 인내와 절제 그리고 충성과 열심으로 그 폐회식을 잘 준비하는 선수가 되어야겠다고 다짐해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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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름다운교회 Feb 18.2018 수동형 or 능동형 인간?
    평창 올림픽이 열리고 있는 우리나라에서 들려오는 크고 작은 일들이 가끔은 우리의 가슴을 시원하게하기도 합니다. 넘어지고도 1등을 하고, 1등을 넘어 올림픽 기록갱신을 이룬 여자 Short track team에게 박수를 보내기도 하고, 아시아 선수로는 불가능한 종목이라고 하는 남자 스켈레톤의 윤성빈 선수가 금메달을 목에 걸게 된 것들이 박수를 받고 있습니다. 특별히 윤 선수는 우승 후에 이런 말을 했습니다. ‘꿈을 품으면 이루어진다’는 것을 배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꿈을 품는다고 그냥 되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너무나 잘 압니다. 아무리 선하고 위대한 꿈을 꾼다고 할지라도 그것을 이루기 위하여 피눈물 나는 훈련을 하지 않으면 꿈은 그저 꿈에 불과할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생활도 그러합니다. 아무리 예배하고, 말씀을 잘 배우고, 기도와 찬양을 많이 해도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기 위한 우리의 고질적인 질병을 고치려는 부단한 노력이 없이는 꿈은 그저 꿈일 뿐입니다.우리의 일상을 가만히 짚어 보면, 참 많은 사람이 요즘은 휴대폰으로 상징되어지는 Social network이 강화된 세상에 우리가 살고 있습니다. 하루에 몇 시간이나 휴대폰이나 컴퓨터를 끼고 살까? 어느 조사에 의하면 하루 평균 5시간 이상을 사용한다는 사람들이 70%가 넘는다고 합니다. 심지어 하루 10시간 이상 휴대폰을 끼고 사는 사람들도 제법 된다고 분석하였습니다. 얼마나 우리가 휴대전화에 중독되어 있는가를 알 수 있는 단면도입니다. 휴대폰 (Smart phone)이 시대의 pattern을 바꾸어 놓은 것도 사실입니다. 정보의 홍수 속에서 순기능을 하고 있는 부분도 참으로 많습니다. 그런데 이보다도 역기능은 없을까요? 저는 이것을 수동형 인간으로 바꾸어지는 기능이 있다고 보여집니다. 물론 적극적인 참여를 하는 분들도 있지만, 대체적으로 남들의 이야기를 보고 듣고 즐기고, like나 달아주거나, 댓글을 써주는 정도로 머무르는 것은 양호할까요? 아예 생각 없이 하루 종일 mobile phone에 집중하고 있는 분들이 의외로 많음을 느낍니다. 그 말은 수동적으로 인생을 사는 확률이 많다는 말입니다. 자기를 계발해 나가고, 건강한 공동체와 마음을 가지기 위한 노력보다는 그저 들어있는 program에 아무런 도전과 생각없이 거기에 생각과 마음을, 심지어 내 삶의 방법까지 담보하는 분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수동적으로 비춰지는 것만을 누리는 삶의 방식이지요. 그러다 보니, 사고능력(思考能力)을 배양하지 못하고 아무 생각없이 감각적으로 세상을 사는 현상이라고 보여집니다. 반면에 능동적으로 사는 분들도 있습니다. 피상적인 세계에 자신을 맡기고 거기에 좌지우지 되는 우를 범하지 않는 분들입니다. 적극적으로, 능동적으로 삶을 대처해 나갑니다. 우리 신앙인들은 어떤 삶에 가까울까요? 수동적으로 시작했다가 능동적으로 바뀌어지는 것이 바로 우리의 신앙생활이라고 보여집니다. 그저 수동적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주시는 힘으로 삶을 개척해 나가고 뭐든 능동적인 대처를 해 나가는 삶, 그것이 바로 ‘믿음의 삶’이라고 할 것입니다. 은혜를 주셔야만 가능한 것이 신앙생활이니 수동적입니다. 그러나 거기서 머물지 않고, 부단히 우리 안에서 그리스도를 닮아가려는 부단한 노력을 하는 능동적 신앙이 필요합니다. 은혜의 사람은 능동적입니다. [이 게시물은 아름다운교회님에 의해 2021-02-23 15:22:13 목회칼럼에서 이동 됨] [이 게시물은 아름다운교회님에 의해 2021-02-23 15:25:36 설교영상에서 이동 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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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6
    아름다운교회 Feb 11.2018 오징어 다리
    어느 부부가 결혼 전의 경험을 이야기 하면서 이런 고백을 하였습니다. 여자는 남자에게 엄청 서운한 감정을 잊지 않고 있었는데 그것은 남자의 이상한 행동 때문이었습니다. 두 사람 다 오징어를 좋아하는데 여자는 몸통을 좋아하였는데 남자는 오징어를 먹을 때마다 몸통은 자기가 홀라당 먹어버리고, 다리만 주더라는 것입니다. 결혼 전이라 서운한 감정을 드러내지 않고 지나갔지만 평생 그것이 한이 맺혀서 서운한 감정을 씻을 길이 없었답니다. 그렇게 세월이 흐르고, 어느 날, 왜 자기에게 그렇게 좋아하는 오징어 몸통을 자기만 먹었는지에 대한 진실을 알게 되었답니다. 남자는 원래 몸통 보다는 다리를 제일 좋아했답니다. 그런데 여자친구를 생각해 보니, 그렇게 좋아하고 맛있는 다리를 주는 것이 애정을 표현하는 것이라고 생각되어 자기가 좋아하는 오징어 다리를 포기하고 몸통은 자기가 먹고, 다리를 여자에게 주었답니다. 결국 사랑하는 방법이 달랐던 것이지요.중국집에 가면 짜장면을 먹을지 짬뽕을 먹을지 늘 고민하듯이, 오징어를 놓고서 마음으로 맛있게 느끼는 부위는 아무래도 몸통 가운데 부위라고 생각하면서도 오징어 다리도 맛있다는 것을 알기에 다시 오징어 다리에 손이 가는 것은 어쩔 수 없나 봅니다. 몸통이냐, 다리냐… 사람에 따라서 어느 것이 귀하고 맛있는 것인지에 대한 차이가 있다는 것을 알려주는 일이지요. 그런데 이 이야기 속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무엇일까요? 서로의 차이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차이가 오해를 불러일으키더라는 것입니다. 작은 오해, 오해(誤解)란 잘못 이해했다는 것인데, 그것은 전적으로 소통과 대화의 장으로 가지 못한 것이 더 잘못입니다. 사람의 차이 때문에 오징어 다리나 몸통일 수는 있어도, 그것 때문에 오해가 되어서 감정을 상하게 되는 것은 우리의 잘못입니다. 서로 솔직한 대화가 있었더라면, 그리고 그 대화로 인한 소통이 이루어졌더라면 훨씬 더 예쁜 삶을 살았을 것입니다. 오징어 때문에 감정 상해서 관계가 어려워지는 일이 있는 것입니다. 그런 일들이 어찌 오징어에 대한 것뿐이겠습니까? 공동체 생활을 하는 교회, 그리고 그 구성원인 성도들 사이에서도 이러나 대화나 소통의 부재 때문에 온갖 이상한 공동체로 발전하게 되는 것은 순전히 우리 자신의 문제이기도 합니다. 성도와 성도의 문제, 성도와 목회자와의 문제, 목장 안에서의 문제 등, 수많은 문제를 생각해 보면, 결국 마음을 터놓고 조금만 서로를 알 수 있는 대화가 있었더라면, 내 입장만을 고수하지 않고, 상대방의 입장을 배려하는 자그마한 마음의 여유가 있었더라면, ‘나는 이러 이러한 것들 때문에 마음이 아파요’라고 표현할 수 있고, 그리고 그렇게 말하는 사람의 마음을 받아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그런데 우리는 그렇지 못했습니다. 내 기준에 맞추어 상대방을 사정없이 깎아 내리고, 판단하고, 서운해 하고, 미워했던 것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성숙이라는 것이 바로 그것이지 않을까요? 상대방이 왜 그런 행동과 말을 하는지, 그 사람의 마음의 한편을 이해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불행하게도 우리는 나만이 중요하고, 나의 판단만이 절대적이라는 자기 절대성을 주장하다가 대화와 소통을 무너뜨리게 되는 어리석음을 범합니다. 서운하고, 미운 감정이 들 때, 나의 입장에서가 아닌 그 사람의 입장에서 한 번 더 생각해야겠습니다. [이 게시물은 아름다운교회님에 의해 2021-02-23 15:22:13 목회칼럼에서 이동 됨] [이 게시물은 아름다운교회님에 의해 2021-02-23 15:25:36 설교영상에서 이동 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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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름다운교회 Feb 04.2018 우리의 부끄러운 민낯
    목회하면서 이런 일도 있었습니다. 교회 안에 중직자들의 신앙생활이 기본적인 헌신도 없어서 성도들의 귀감이 되지 않아서 목회자로서 많은 고민이 있었습니다. 나름대로 성숙한 제자라고 한다면 이런 정도는 해 주어야 하지 않을까하는 아쉬움 말입니다. 고민하다가 당회를 거쳐서 권면과 훈계를 하기로 결정하고 3분의 중직자들에게 ‘권계장’이라는 것을 보냈습니다. 당연히 반발이 있었고, 그들과 평생 불편한 관계를 가져야 했습니다. 그 권계장의 내용은 특별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우리가 지금 제직들에게 받은 3가지 헌신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중직자들로서는 가장 기본에 해당되는 것이었습니다. 기본이 안되면 부끄러워할 줄 알아야 하는데 너무나 당당합니다. 생각해 보니, 다들 그런데 우리라고 별거냐는 그런 의식이 있는 것 같습니다.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하고 거룩한 백성이 된 성도라 이름하는 교인들이 바로 우리들입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구원의 감격을 맛본 사람이라고 하면 예배의 소중함과 감격이 없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 교회의 예배를 보면 정말 부끄러움을 금할 길이 없습니다. 80%의 교인들이 예배시간을 지키지 않기 때문입니다. 예배를 시작하는 시간에 불과 몇 명만이 자리를 지키고 있을 뿐입니다. 거의 설교 시간이 되어서야 자리가 차고, 그것도 모자라 예배 끝나고 오는 사람도 허다합니다. 주일학교가 제 시간에 시작을 못할 정도로 아이들이 늦게 옵니다. 그 말은 아이들의 부모가 늦게 온다는 말입니다. 물론 피치 못하게 늦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상습적이라면 문제는 다릅니다. 토요일 늦은 시간까지 일하거나 놀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피곤할 수가 있습니다. 그것이 합당한 이유가 될지는 모르겠습니다. 중요한 약속이 있을 때, 소중한 분들을 만날 때, 늦지 않으려고 애를 씁니다. 데이트를 해도 절대로 늦지 않습니다. 자녀들, 학교에 늦게 보내지 않습니다. 사람들에게도 최소한의 예의를 지키려고 애를 씁니다. 그런데 전능하신 하나님 아버지를 예배하는 하나님의 임재현장을 우리는 방관하거나 소홀합니다. 예배를 드리는 모습, 예배에 임하는 성도들의 자세를 보면 그 교회의 수준을 알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교회의 모습은 정말 ‘부끄러운 민낯’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이런 모습을 어떻게 보실까 궁금합니다. ‘교회 문을 닫았으면 좋겠다’고 탄식하는 것은 아닌지 목사로서 조마조마합니다.이런 우리들의 부끄러운 민낯을 고발합니다. 그러고도 이 상습적인 지각에 대해서 우리 스스로 결단하지 않으면 주님의 준엄한 책망을 피할 길이 없습니다. 예배시간에 맞추어 오는 것에 만족하지 말고, 최소한 예배시간 10분전에 도착해서 기도하면서 오늘 예배를 통한 하나님의 임재를 갈망하는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예배시간에 늦어서 헐레벌떡 뛰어야 하는 자세로 신앙생활하지 말아야 합니다. 간신히 예수 믿지 말고, 능력 있게 예수를 믿읍시다. 예배는 우리의 영적 능력의 공급처이며, 우리의 헌신의 장소이며, 하나님의 임재를 누릴 수 있는 영광의 장소입니다. 예배에 다들 늦으니까 예배에 늦게 오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습니다. 부끄러워해야 합니다. 우리의 이 부끄러운 민낯을 부끄러워해야합니다. 이러면서 어떻게 베가스의 영혼을 책임질 수 있겠습니까? 예배, 우리의 생명입니다. [이 게시물은 아름다운교회님에 의해 2021-02-23 15:22:13 목회칼럼에서 이동 됨] [이 게시물은 아름다운교회님에 의해 2021-02-23 15:25:36 설교영상에서 이동 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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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름다운교회 Jan 28.2018 기준을 높여야 합니다.
    이민 교회 그리고 개척교회를 해 보면서 아쉬움이 남는 것이 있습니다. 성도됨 그리고 교회됨의 표준을 어느 정도로 잡아야 하는가입니다. 성경의 표준에는 못미쳐도 그나마 나름대로 성숙한 제자라고 한다면 이런 정도는 해 주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아쉬움 말입니다. 전통이 있는 교회는 나름대로 노하우를 가지고 있고, 나름대로의 규율이 있습니다. 그것을 지키려는 노력을 하지 않아도 많은 자원과 능력들을 갖추고 있어서 구태여 강제하지 않아도 어느 정도의 높은 표준을 가지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장로는 이정도 되어야 한다, 권사 안수집사는 이런 정도는 해야 한다는 것들입니다. 한 교회에서 오랫동안 신앙생활을 하다가 보면, 자연스럽게 선배들을 따라하다 보면 나름대로 그 기준에 부합하는 인물들이 나오기도 합니다. 그런데 작은 교회에서는 그렇지 않습니다. 일단 사람이 부족하기도 하여 조금만 열심을 내도 금방 사람들의 눈에 뜨여서 교회 나온 지 얼마 되지 않아도 곧 바로 중직을 맡게 되는 경우도 허다합니다. 그러다가 보니, 기준이 낮아집니다. 예배 생활, 기도생활, 십일조 생활은 기본인데 이민 교회, 작은 교회에서는 그것만 해도 영웅처럼 대접받습니다. 그러나 기본이 되어있는 교회에서는 그 정도는 그냥 모두가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민 교회에서는 예배 생활은 물론이거니와 기도 생활하는 사람을 보는 것은 희귀한 일이 되었습니다. 대충해도 제직으로 임명해 줍니다. 그러다가 보니 기준이 한참 낮습니다. 웬만한 교회에서는 서리집사 감도 못되는 사람들이 작은 교회에서는 장로가 되어 있습니다. 그것이 참 많은 아쉬움을 갖게 합니다. 기준이 낮아진 것입니다. 왜냐면 모두가 그렇게 하니까 그것이 부끄러운 일인지도 모르고 그대로 하게 되는 것입니다.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교회는 하향 평준화를 하게 해서는 안됩니다. 상향 평준화를 이루어야 하고 그것을 위하여 노력해야 합니다. 낮은 기준으로 살면 발전이 없습니다. 점점 기준이 낮아지면 그 교회는 실력이 한참 처집니다. 신앙생활 대충해도 되는 분위기에 살면 그 교회는 소망이 없습니다. 때로는 사정없이 매를 대야 할 때도 있는데 시험들까봐, 교회가 어려워질까봐 매를 대지 못할 때도 있습니다. 그렇게 하면 안돼! 라고 하고 싶어도 시험들까봐 그러지 못한다고 하면 문제가 있습니다. 우리 교회도 그렇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보면 점점 그 영적 성숙의 기준이 낮아지는 것을 보고 있으면서도 어떻게 해볼 길이 없는 무기력을 발견하게 됩니다. 찬양팀도 기준이 점점 낮아집니다. 제직의 기준이 점점 낮아집니다. 자꾸 사람들이 할 수 있을 만큼의 기준으로 낮추면 나중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날이 오게 됩니다. 그래서 기준은 높여야 합니다. 힘들어도 기준을 높여야 합니다. 오늘 날 이 사회가 점점 더 교묘해지고 타락해지는 이유 중의 하나는 그 기준이 점점 낮아진다는 것에 있다고 보여집니다. 우리 교우들의 신앙생활의 기준이 점점 낮아지는 것을 보면서 마음이 안타까울 때가 많습니다. 늘 낮은 기준으로 살다가 보면 그 기준을 조금만 높여도 다 실격해버립니다. 주님은 우리로 하여금 강한 군사로 성장하기를 원합니다. 그런데 강한 군사는 강한 훈련에 있습니다. 그것은 높은 기준이 적용되기 때문입니다. 유치원문제를 풀고 있으면서 대학에 다니기를 원하는 사람들이 문제입니다. 실력을 배양해야 합니다. [이 게시물은 아름다운교회님에 의해 2021-02-23 15:22:13 목회칼럼에서 이동 됨] [이 게시물은 아름다운교회님에 의해 2021-02-23 15:25:36 설교영상에서 이동 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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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름다운교회 Jan 21.2018 연약한 것 키우기
    지난 해, 심장에 3개의 Stent를 집어넣는 시술을 하고 나서 회복의 속도가 많이 늦어져 의사와 집중 상담과 검사를 통해 얼마 전부터 Cardiac Rehabilitation treatment를 받고 있습니다. 일종의 심장재활치료라고 할까요? 이 치료는 일주일에 3번씩 12주를 진행하는 재활치료 프로그램인데, 이 치료를 통해서 정상적인 심장활동과 회복을 기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치료는 운동을 통해 심장을 정상적으로 회복시키는 훈련입니다. 운동을 지속적으로 하고, 점점 강도를 높여서 정상적인 활동을 하게 하는 치료훈련인데, 여러 가지 운동을 체계적으로 간호사와 치료사의 관리아래 진행합니다. 그 운동에는 여러 가지들이 포함되는데, 자전거 타기, 걷기, 손 자전거, 역기, 계단 오르내리기 등등의 훈련을 하게 됩니다. 아직은 시작단계라서 그리 많이 힘들지는 않지만 어떤 운동은 정말 힘이 드는 종목이 있습니다. 어떤 운동은 휘파람 불며 할 수 있을 만큼 가벼운 운동인데, 어느 운동은 그 정해진 시간을 채우는 것을 이를 악물고 감당해야 합니다. 눈을 감고 숫자를 세면서 빨리 지나가기를 기다리는 나의 모습을 보면서 한 가지 배운 것이 있습니다. 왜 어떤 운동은 힘들지 않게 넘어가는데, 왜 어떤 운동은 왜 이리 지겹도록 힘이 들고 하기가 싫은 것일까. 가만히 생각해보니, 내 신체 중에서 가장 약한 부분이 가장 힘이 들게 운동을 하고 있다는 결론에 도달했습니다. 가장 연약한 부분이기에 그 부분을 단련하는 것이 가장 힘들다는 것이지요. 튼튼한 부분은 그리 힘들지 않게 움직일 수 있는데 상대적으로 가장 연약한 부분은 과부하가 걸려서 힘들어하더라는 것입니다. 이런 모습을 보면서 깨닫게 된 것이 하나 있습니다. 우리의 인생에도 그런 부분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성품이든, 육체적인 병약함이든 간에 약한 부분이 있어서 그 약한 부분은 더욱 단련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연약하다고 훈련을 멈추면 고쳐질 수 없습니다. 그것은 그 사람의 ‘약점’입니다. 그것이 연약한 부분입니다. 어떤 분은 불쑥 화를 잘 내는 성품이 있습니다. 어떤 분은 말을 함부로 해서 남에게 상처를 주는 분도 있습니다. 어떤 분은 자기 안에 분노와 상처를 안고 마구 남을 Hurt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그것들은 자신의 약점입니다. 어떤 이는 외모에, 학벌에, 재산의 정도에, 직업에 약점을 가졌다 생각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그것 때문에 고통하고 또 고통을 당합니다. 그것들을 고친다는 것은 매우 어려워 보이고, 불가능해 보일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개선을 멈춰서는 안됩니다. 우리 안에 약한 부분들이 드러나면 우리는 그것을 탓하거나, 책임을 전가하거나 포기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 약점을 강점으로 바꾸는 훈련을 해야 합니다. 내게 아픈 부분은 더 힘든 부분입니다. 그래서 더 근력을 키워야 합니다. 그래야 건강을 회복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이 바로 그런 것입니다. 아무도 완벽한 사람이 없습니다. 각자가 약점(연약한 부분)을 가지고 있습니다. 힘들다고, 고치기엔 늦었다고 포기하면 안됩니다. 오히려 더욱 강하게 훈련하여야 합니다. 약하기에 힘이 듭니다. 약하기에 더욱 아파합니다. 그러나 약하다고 그냥 포기하거나 고통스러운 훈련의 과정을 중단하면 우리는 늘 그냥 약한 것만 남습니다. 약함이 있다는 것은 그 약함을 이기도록 잘 단련해 내서 건강한 영적인 삶을 살라는 하나님의 뜻입니다.  [이 게시물은 아름다운교회님에 의해 2021-02-23 15:22:13 목회칼럼에서 이동 됨] [이 게시물은 아름다운교회님에 의해 2021-02-23 15:25:36 설교영상에서 이동 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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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름다운교회 Jan 14.2018 교회의 직분자가 된다는 것
    올 해 우리 교회는 11분의 서리집사가 새롭게 임명되었습니다. 이 분들은 생애 처음으로 ‘집사’라는 칭호를 받는 분들입니다. 장로, 안수집사, 권사와는 달리 서리 집사는 매년 교회로부터 임명을 받아서 1년 동안 집사의 직분을 행하는 임시직입니다. 저희 교회는 이러한 분들을 사랑하고 축복하며 축하해드리고 있습니다. 이분들에게 거는 기대가 있습니다. 좋은 모델을 만들어 달라는 것입니다. 앞선 선배들의 고질병과 같은 모습은 닮지 말고, 순종하며 말씀대로 좋은 영향력을 줄 수 있는 분들이 되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어찌 신임 서리집사에게만 요청되는 것이겠습니까? 기존에 있던 모든 직분자들에게 요청되어지는 것이지요. 제가 어려서부터 배운 것이 이러한 원리입니다. ‘하나님 중심, 성경 중심, 교회중심’이라는 말입니다. 아주 단순하면서도 신앙생활의 모든 원리가 이 세 마디에 담겨져 있음을 깨닫게 된 후에는 정말 진리라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습니다. 직분자들은 하나님 중심의 삶, 성경 말씀에 순종하는 삶, 그리고 교회 중심의 삶을 살도록 배운 것입니다. 특별히 직분자가 되었다 함은 교회 중심의 행동반경을 가진 사람이어야 합니다. 직분자가 교회중심으로 움직여지지 않으면 그 직분은 개인의 명예를 위한 직분이 되어버립니다. 직분을 받았으면서도 교회 중심으로 행동하지 않으면 직분을 명예처럼 사용하는 사람이 되어버립니다. 직분자는 믿음이 좋아야 하지만, 아무리 믿음이 좋아도 교회 중심으로 움직이지 않으면 그 교회에 쓸모없는 직분자가 되어버립니다. 교회중심이라는 말은 모든 삶의 중심에 교회를 두고, 생활하는 모든 마음이 교회를 향해야 한다는 의미이기도 하지만 실제로 교회가 움직이는 방향으로 함께 걷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어떤 직분자는 교회가 어떻게 움직이든 상관하지 않고 자기가 가고 싶은 길을 갑니다. 회의를 해도, 행사를 해도, 그것에 맞추어 시간계획을 편성합니다. 그러나 직분자들은 여행, 직장, 가족모임, 각종 회의를 교회의 움직임에 따라서 편성해야 합니다. 그것이 책임있는 직분자들의 자세입니다.바울 사도는 그 직분을 맡은 사람에게 요구되어지는 것은 오직 ‘충성’이라고 했습니다(고전4:1). 다른 많은 요구조건이 있을 법한데, 한 가지를 분명하게 선을 그었습니다. ‘충성’ 에는 두 가지 조건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는 변하지 않는 신실함 그리고 다른 하나는 책임감입니다. 충성하는 직분자들은 변하지 않는 신실성이 있습니다. 충성의 기질은 뜨거움이나 열정보다는 이 변함없이 일관된 삶을 의미합니다. 자기 기분에 따라 움직이지 않고, 자신의 가치관에 따라 판단하지 않으며, 오직 자기를 써 주시는 주인의 마음에 따라 움직이는 것을 말합니다. 그리고 책임감은 그러한 자세 가운데서 필수적으로 수반되는 결과입니다. 맡은 일에 책임감이 없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책임감이 없는 사람들은 남에게 미루거나, 자기에게 맡겨진 일에 관심이 없습니다. 충성됨이란 성령의 열매이기도 합니다. 정말 성령의 사람은 이러한 ‘충성이 있는 사람입니다. 성령은 받았는데 이러한 충성됨이 없이 자기 기분에 따라 사는 사람은 미성숙한 사람일 뿐입니다. 새 해에 각자에게 주어진 직분이 있습니다. 주님이 요구하시는 것은 바로 ’충성‘입니다. 그것은 열정이 아니라, 신실과 책임감입니다. [이 게시물은 아름다운교회님에 의해 2021-02-23 15:22:13 목회칼럼에서 이동 됨] [이 게시물은 아름다운교회님에 의해 2021-02-23 15:25:36 설교영상에서 이동 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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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름다운교회 Jan 07.2018 그러면 안되는 것이었습니다.
    2018년의 새 해가 밝아, 첫 주일을 맞이합니다. 지난 일들은 이제 잊어버리고 새로운 날을 친구삼아 새 출발을 합니다. 다시 한 번의 기회가 우리에게 주어진 셈입니다. 정말 얼마 남지 않은 시간들을 어떻게 보내야 하는지 많은 생각을 하게 되는 인생입니다. 축포를 터트리며 새 해를 출발하면서 우리는 ‘새 해 복 많이 받으세요’라고 하나님의 복을 간구하고 출발하였습니다. 송구영신 예배도 그렇고 신년 축복 특별새벽기도도 그렇습니다. 복(福)만을 추구해서가 아니라 하나님과동행하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을 살고 싶어서 그 소망과 간절함이 그런 삶으로 나아가게 되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사는 날들은 그리 만만한 삶이 아닐 것으로 알고 갑니다. 모든 일들이 잘되는 것을 바라지만 언제나 그랬듯이 원하지 않은 상황들이 참 많이 우리 주변에 일어났습니다. 그것들은 안 일어나야 하는 ‘비극’이라고 생각하면 정말 비극입니다. 그러나 그것들은 우리 인생을 든든히 주님앞에 세우고자 하는 하나님의 손길로 받아들이고 주님이 만들어주신 길을 믿음으로 흔들리지 않고 걷다가 보면 훨씬 성숙한 길로 가게 됨을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어버이 날에 듣는 가슴을 울리는 시가 있습니다. 제목은 ‘엄마는.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라는 심순덕 님의 시입니다. “엄마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여름 뙤약볕을 머리에 인 채 호미 쥐고/온 종일 밭을 매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엄마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그 고된 일 끝에/ 찬 밥 한덩이로 부뚜막에 걸터 않아/끼니를 때워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중략) 내가 엄마가 되고 엄마가 낡은 액자 속/ 사진으로만 우리 곁에 남아 있을 때/ 비로서… / 엄마는 그러면 안되는 것인 줄 알았습니다/ 엄마는… / 엄마는… / 그러면 안되는 것이었습니다. 이 시를 읽으며 눈물을 쏟은 때가 있었습니다. 당연히 엄마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는데, 깨닫고 보니 아, 엄마는 그래도 되는 것이 아니었다는 말이 가슴이 먹먹해졌던 적이 있었습니다.우리의 신앙생활도 그런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신앙생활 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기도 안해도 되고, 말씀 안 읽어도 되고, 예배 생활에 좀 늦게 나가도 되고, 설교시간에 졸거나 잡담하거나, 핸펀으로 장난하거나, 밖으로 맴돌아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모두가 그렇게 하니, 신앙생활 그렇게 해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은혜받고 보니, 신앙생활 그렇게 하면 안되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시지어 읊고 싶습니다. 남들과 같이 편안하게 살고 싶고, 남들처럼 득달하지 않고 편하게 목회하고 싶고, 놀러가고 싶은 것 마음대로 하고, 특별 새벽예배, 부흥집회, 각종 양육성경공부, 목장모임등, 성도들 귀찮게 하는 일들 하지 않아도 교회만 재미있게, 잘 운영되고 부흥한다면 다 없애면 어떨까요? 예배시간 늦는다, 찬양팀 게으르지 말라, 잔소리 안해도, 그래서 얼굴 붉히며 살지 않아도 되는 것 아닐까요? 그냥 주일 예배에 와서 편하게 예배만 드리고 가도하는 것이 신앙생활이라고 해도 되지 않을까요? 그런데, 만약 우리의 삶의 마지막에서 주님이 ‘신앙생활 그러면 안 되는 것이었습니다’라고 한다면 아, 그땐 어떻게 할까요? 그 일을 피해야지 않겠어요? 쉽지 않은 신앙생활 다시 달려갑니다. 힘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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