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회칼럼(박대우목사) 5 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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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칼럼(박대우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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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름다운교회 Feb 19.2023 자랑하지 말라
    이솝 우화인줄 알았는데, 몽골에서 전해지는 민담이라고 합니다. ‘하늘을 나는 개구리’ 들어보셨을 것입니다. 가뭄이 들었습니다. 연못이 마르기 시작했고, 그곳에 살던 청개구리가 삶의 터전이 위협받는 것을 보면서 살 길을 모색했습니다. 유일한 길은 멀리 떨어져 있던 호수로 이사가는 길인데 방법이 묘연했습니다. 그러다가 묘책을 떠올렸습니다. 연못에 찾아오는 기러기에게 부탁해서 자신을 옮겨 달라고 하는 것인데, 기러기 두 마리가 나뭇가지를 물고 날면, 내가 그 가지를 물면 하늘을 날아서 저 호수로 옮길 수 있다는 아이디어입니다. 기러기들을 설득해서 드디어 하늘을 날게 되었습니다. 이 광경을 본 밑에 있는 사람들이 기가 막혔습니다. ‘야, 저것 좀 봐, 개구리가 하늘을 나네? 신기하네. 신기해!’ 이 말을 들은 청개구리는 웃음이 가득했습니다. 자랑스러웠습니다. 그래도 꾹 참을 수 밖 에 없었습니다. 입을 열면 떨어져 죽으니까요. 그런데 다음 사람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야, 정말 기가막힌 아이디어인데, 멍청한 청개구리가 했을 것 같진 않고, 아마도 기러기가 아이디어를 냈을거야. 기러기들, 정말 대단한데!!’ 이때까지 잘 참고 있던 개구리는 이 말을 듣자 갑자기 화가 치밀어 올랐습니다. ‘아니, 이건 내 아이디어인데, 기러기가 아니라고’ 자기 대신에 기러기가 칭찬을 받는 모습을 참을 수가 없어서 청개구리가 드디어 입을 열었습니다. “아니야, 기러기가 아니라 나라고... 나!!‘ 말하는 순간에 그는 허공에서 떨어지고 있었습니다. 자신이 인정받아야 할 영광이 남에게 돌아가는 것을 절대로 참을 수 없는 것이 청개구리만일까요? 우리 인간은 그 보다도 더 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아무리 괜찮다는 품격을 갖추어도 인간의 질투심만큼은 당해낼 재간이 없기 때문입니다. 세계에서 가장 많은 명품을 사는 나라가 어디냐고 하니, 대한민국이라는 통계가 나왔습니다. 그렇다고 대한민국이 세계에서 가장 잘사는 나라이냐? 그렇지 않습 니다. 그 이면에는 아마도 자랑하고 싶다는 충동과 자족감이 있을 것입니다. 많은 분들이 그렇게 말합니다. 명품산다고 행복해지는가? 아니라고요. 자랑도 한 두 번이지 않겠습니까? 성경은 말씀합니다. ’오른 손이 한 일을 왼 손이 모르게 하라‘고 말이지요. 신앙간증하는 사람도 잘못하면 자기 자랑에 그칠 수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셔야 하는데 자기가 영광을 받는 일이 비일비재하고, 그것을 모두가 부러워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자랑이 넘어서면 교만으로 변질됩니다. 이 교만은 하나님이 정말 싫어하시는 항목입니다. 나는 겸손한 사람이라고 자기 스스로 생각하는 사람도 가만히 보면 정 반대라는 것을 깨닫지 못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자랑하지 말아야 합니다. 내가 한 일을 소문내지 말아야 합니다. 그것이 잘 한 일이라면 더욱 그렇습니다. 내 자랑으로 인해 상대방이 오히려 부끄러워질 때도 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에게 자랑이 많아진다면 사람에게서 받는 상은 커집니다. 그들의 칭찬도 많이 늘어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 받을 상은 없어집니다. 주님은 말씀합니다. ’네 상을 이미 받았으니라.” 마태복음 6장에서는 신랄하게 이 자랑성 신앙행위에 대해서 엄격하게 경고하고 있습니다. 자랑하지 않는 것, 남이 내 것까지 받을 것 이라는 이 질투심을 깨야 자랑이 멈춥니다. 주님의 칭찬이 최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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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름다운교회 Feb 12.2023 부르는 곳 없어도 갈 곳은 많다
    성공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참 감동적인 일들이 많습니다. 누구도 생각지 않은 상황을 극복하는 이야기는 우리들의 마음을 움직이게 합니다. 남들이 똑 같은 생각을 할 때, 그는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상식과 환경을 보면서 안된다고 하지 않고, 길을 열어가는 그 마음이 참 감동적입니다. 요즘 시대에 교회가 어렵다고 합니다. 성도들은 줄어들고, 교회가 위축되었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어느 몇 교회의 예외적인 상황을 빼고는 전반적인 현상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그러자 신학교도 어려움이 왔습니다. 과거에는 수많은 경쟁을 치루어야 입학이 가능했는데, 이제는 미달을 걱정해야 할 상황이고, 심지어 졸업을 해도 갈 곳이 없어서 방황하는 신학생들이 너무 많다는 이야기가 심심치 않게 들립니다. 교회가 어려우니 신학생을 받아 줄데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자 어느 목사님이 이런 신학생들에게 이렇게 도전했다고 합니다. ‘부르는 곳은 없어 도 갈곳은 많다!’ 여기엔 두 가지 의미가 담겨져 있다고 봅니다. 하나는 자기가 가고 싶은 곳은 있어도 불러주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가고 싶은 곳은 많은데, 불러주지 않는다는 말이지요. 둘째는 아직도 갈 곳이 있다는 말입니다. 한국의 군대에는 군목이 있습니다. 그런데 군목이 없거나 극소수여서 예배를 드릴 수 없는 오지의 군대가 많다는 말도 있습니다. 시골이나 산골, 혹은 섬등에도 목회자가 없어서 아우성인 곳도 많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런 험한 곳은 누구나 가려고 하지 않고, 오히려 자기 목회경력에 이익이 되는 곳, 좀 더 내가 목회하기에 나은 곳을 찾다가 보니 갈데가 없는 것입니다. 노년이 되어 갈 곳이 없다고 합니다. 불러주는 곳도 없다고 합니다. 그러니 자연스럽게 노인이 되는 것도 모자라, 더 기운빠진 노인이 되어져 갑니다. 마음도 생각도 행동도 점점 노인으로 치닫게 됩니다. 그러나 생각을 달리해 보면, 갈 곳 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갈 곳은 많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내가 가고 싶은 곳이 아니기 때문에 없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인생은 사명을 따라 살 때가 가장 아름답습니다. 제가 유학을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가고자 할 때에 갈 곳이 없었습니다. 답답한 마음이 많았습니다. 그런데 기도하다가 그런 마음을 하나님이 주셨습니다. 불러주는 곳이 없으면 복음 때문이라도 서울역에 가서 노방전도 라도 하겠다는 사명감을 주셨습니다. 복음을 위해 하나님께서 불러주셨는데, 내가 갈 곳이 없다고 한탄하느냐고 책망하셨습니다. 그런 마음으로 돌아갔습니다. 하나님은 많은 일을 하도록 돌봐주셨습니다. 많은 사람이 불러주기를 원합니다. 불러주는 곳이 내가 갈 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그렇지 않습니 다. 사명은 찾아가는 것입니다. 내가 원하는 곳이 아닌, 하나님이 원하는 곳입니다. 결혼도 사람이 없어서 못하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원하는 사람이 없다고 하기 때문입니다. 내가 사명으로 갈 곳은 얼마든지 있습니다. 하나님이 찾으시는 장소는 얼마든지 기다리고 있습니다. 다만 내가 갈 수 있는 곳을 한정해 놓고 있기 때문에 그 곳이 보이지 않기 때문입닙니다. 나이가 들어 은퇴하는 것도 그렇습니다. 부르는 곳은 없어도 하나님이 보낼 곳은 얼마든지 있습니다. 그런데 나는 내가 가고싶은 곳을 고집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문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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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름다운교회 Feb 05.2023 기분 좋은 장례식
    항상 선한 영향을 주었던 목사님 한 분이 갑자기 심장마비로 71세 일기로 세상을 떠나셨다는 안타까운 소식을 듣고, 노회와 해당 교회에서 진행하는 장례식에 California로 급히 다녀왔습니다. 11명의 형제자매를 둔, 대 가족안에서 막내로 자라셨다고 합니다. 생전에 4남매를 두셨는데, 자녀들이 말하기를, 아버지는 11명 안에서 자라셨는데, 당신은 4명으로 그쳤다고 조크를 하면서 조사를 하는 것이 인상적이었습니다. 우리는 4명만 낳아도 무슨 우주인 만난 듯하게 생각하는 문화가 있는데, 이 분들은 多産(다산)을 자랑스럽게 여깁니다. 여기에는 그들의 성경적 세계관이 삶에서 녹아져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교회의 태동에서부터 노회에서 우리 교회를 위하여 많은 조언과 사랑을 부어주셨기에 마음 깊이 남겨진 미국 목사님이셨습니다. 장례식을 다녀보니 우리 한국인이 하는 장례식과 미국 사람들이 하는 장례식에는 참 많은 차이점이 있습니다. 우리의 장례식은 아주 거룩하고 엄숙하고 무거운 분위기 속에서 이루어집니다. 잃었다는 슬픔이 더 강조된 장례 문화이기 때문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도 발견할 수 있었던 것은 슬픔이 없는 것도 아닙니다. 눈물도 있고, 탄식도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에게 없는 다른 한 가지가 있습니다. 그것은 ‘기쁨’과 ‘영광’입니다. 이번에 참석한 장례식에서도 어김없이 발견한 것이 이것이었습니다. 이름조차도 funeral service가 아닙니다. ‘Celebrating ...’입니다. 돌아가신 분에 대한 아름다운 회고입니다. 박장대소가 터지고, 때론 눈물이 터집니다. 이 미묘한 두 사이에서 조화롭게 이루어지는 것은 두 가지 축제가 진행되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하나는 우리를 이 땅에 보내신 하나님께 대한 영광의 고백입니다. 하나님이 하신 일을 마음껏 높여드리며 찬양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이 장례식의 주인공은 망자가 아니라 하나님 이시라는 느낌이 들 정도입니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축하입니다. 말 그대로 Celebrating입니다. 하나님께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다가 하나님의 품안에 안겼다는 기쁨입니다. 이것을 축하하는 것입니다. 저는 이것이 지극히 성경적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 믿는 사람의 장례식은 바로 이래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나도 내가 죽거든 그런 장례식을 치루어 주었으면 하는 간절한 바램을 가져봅니다. 죽은 나 보다는, 나를 이 땅에서 그 분 품안에 있게 하시고, 그리고 다시 영원한 그 나라로 부르실 하나님 그리고 그 구원의 길을 열어주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인공이 되시는 그런 장례식, 생각만 해도 멋집니다. 우리의 장례식이 죽은 자를 슬퍼하고, 남은 유족을 위로하는 것에 초점이 맞추어진 것이라면, 이 색다른 장례식은 죽은 자를 위한 것도, 유족을 위한 것도 아닌 것도 아니 면서도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드리는 장례식, 그것도 슬픔이 주제가 아니라, 축제의 분위기 속에서 울고 웃고, 그리고 마음 속에는 하나님이 남겨지게 할 수 있는 장례식이 이토록 기분좋게 하는 것이 없었습니다. 마치고 나오면서 가슴속 에 깊은 여운은 ‘기분 좋은’ 장례식에 다녀왔다는 것이었습니다. 돌아오는 차속에서 저절로 입에서 찬송이 나왔습니다. 차가 막히고 답답한 길을 달려가지만 마음 속 깊은 곳에서 하나님을 향한 찬양이 터져나오면서 눈가가 촉촉해졌습니다. 우리 주님이 영광을 받으시는 이 기분 좋은 장레식을 닮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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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름다운교회 Jan 29.2023 기도하십시오
    기독교 신앙에서 언젠가부터 ‘기도하라’는 말이 진부한 표현이 되어가고 있는 것은 아닌가 싶습니다. 누군가 나에게 잔소리를 할 때에 ‘아, 설교는 그만해’라고 말하는 이치와 같습니다. 설교를 하나님의 말씀의 전달로 보지 않고, 타이르고, 억압하고, 잔소리하는 시어미와 부모같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기도하라는 말도 그렇습니다. 사실은 기도도 안하면서 ‘기도할게, 기도해줄게’라고 말하거나, 기도 안할 줄 뻔히 알면서도 그냥 ‘기도해줘’라고 부탁하는 것과 같습니다. 어느 외국 인이 한국에 와서 사귄 친구가 ‘언제 한번 만나 밥 한번 먹자’라는 말을 듣고 손꼽아 기다렸답니다. 그런데 아무리 기다려도 연락이 안오더랍니다. 나중에 알고보니, 한국 사람들은 그냥 인사치레로 ‘밥한번 먹자’라고 한다는 것을 알고 황당해했다고 합니다. 그럴거면 차라리 밥먹자 말하지 말지 왜 그러냐고 꼬집었습니다. 그만큼 우리는 빈 말을 많이 한다는 이야기이겠지요. 기도한다는 것, 기도해 준다는 것, 사실 이것이 무엇인지를 아는 사람은 그렇게 이야기 할 수 없습니다. ‘집사님, 기도할게요’라고 하면서 전혀 기도하지 않는 것은 얼마나 나쁜 습관인지 모릅니다. 그러나 기도는 정말 위대한 작업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기도라는 이 위대한 사역 을 주신 것은 몇 가지 목적이 있으셨다고 저는 믿습니다. 첫째는 연약한 인간이 하나님을 알게 하기 위함입니다. 기도를 통하여 우리는 하나님을 더 깊이 알아갑니다. 둘째는 하나님의 놀라운 일을 우리로 하여금 체험케 하기 위함입니다. 셋째는 어려운 문제에 닥칠 때 우리로 하여금 견디고 이길 수 있는 힘을 주시기 위함입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축복입니다. 이렇게 간단히 생각해도 기도는 정말 위대한 신자의 특권입니다. 그래서 기도는 능력입니다. 하나님을 알아가는 일, 하나님의 놀라운 일을, 기도라는 방법으로 이루어가시는 놀라운 체험은 정말 성도가 다이나믹하게 신앙생활 하도록 길을 활짝 열어줍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렇지 못할 때입니다. 우리는 인간입니다. 완벽한 사람이 하나도 없습니다. 그래 서 실수도 하고, 욕도 먹고, 실패도 경험하고, 낙심에 빠지기도 합니다. 우리의 삶이나 교회 생활 가운데서 어려운 문제를 경험하기도 합니다. 그럴 때 우리는 어떻게 반응합니까? 너무나 쉽게 우리는 수근대고, 뒷담화하고, 비난하고 비판하는데 골몰하게 됩니다. 이상합니다. 그렇게 안하려고 해도 그렇게 됩니다. 왜냐면 그 뒷배경에는 항상 마귀의 작전이 개입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내가 다니는 교회를 내가 비난하면, 누가 그 비난하는 소리를 들으면서 새로운 사람을 우리 교회에 데리고 나오고 싶어하겠습니다. 당장 불평하는 사람부터 아무도 안데리고 오려고 할 것입니다. 오직 교회를 사랑하고, 기뻐하는 사람만이 사람들을 주님께로 데리고 나올 수 있습니다. 서로 험담하고, 불평하고, 뒷담화하 는 모습을 보면 전도하고싶지 않습니다. 죽은 신앙이 되어가는 것입니다. 그럴 때 어떤 자세를 취해야 합니까? 기도해야 합니다. 내 눈으로 불의와 불평할 일을 보거든, 그런 사람들과 어울리지 말고 침잠하면서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으셔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일을 풀어가실 수 있도록, 우리는 교만한 혀를 사용하지 않고, 겸손하게 하나님이 도와주시기를 기도해야 합니다. 그것이 사는 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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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53
    아름다운교회 Jan 22.2023 교회 사역 어떻게 해야할까?
    언젠가 다른 지역의 교회를 섬기는 형제에게서 자기 교회의 사역을 이야기 하면서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교회의 담임목사님이 각 부서에 맡은 사역자들에게 자신이 하는 일을 다 내려놓고 자기가 하고 싶은 사역을 하지 말고, 교회가 원하는 사역을 하도록 해보자라고 했다는 것입니다. 그에 따라서 모든 사역자들이 하루 아침에 내가 잘 할 수 있는 사역 대신에 교회가 해야 하는 사역에 집중하면서 사역의 재배치가 일어났다는 것입니다. 이 말을 듣고 저는 만감이 교차했습니다. 본래 교회 사역이라는 것이 자기에게 주신 은사(달란트)에 따라서 섬기는 것이 원칙일 것입니다. 내가 가진 재능으로 섬기고, 내가 하고싶은 것을 가지고 섬기는 것이 당연하다고 여길 것입니다. 그것이 정말 맞습니다. 이런 조건 아래서 말이지요. 모든 사역자들이 모든 분야에 고른 은사자들이 있다는 전제 말이지요. 모든 기관과 부서에 고른 사역분배가 일어나서 목마름과 배고픔이 없이 언제든지 자기가 맡은 사역을 잘 해 낼 수 있다면 그것은 정말 금상첨화(錦上添花)일 것입니다. 그래야 효과적으로 일을 맡아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면 피아노를 치는 사람이 바이올린을 연주하라면 할 수도 없을 뿐만 아니라 해서도 안됩니다. 음악이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아마도 극단적인 예가 될 것입니다. 그러나 교회 사역의 현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더더구나 규모가 적은 교회에서는 언감생심입니다. 당장 하나의 사역부서를 끌고가기에도 벅찬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입니다. 누가 주방에 들어가서 찬물에 손담그고, 남들의 하시를 받아가며 봉사하고 싶은 사람이 있겠습니까? 찬양팀은 그래도 사람들 앞에서 폼(?)이라도 나고, 하는 사역의 열매도 있잖아요. 칭찬과 대접도 받고 말이지요. 한번은 찬양팀 이 잘나갈 때, 찬양팀에게 요구를 했습니다. 이제 찬양팀을 그만두고 주일학교 부서가 살아야 하니, 주일학교에 가서 교사로 봉사를 하라고 말이지요. 그랬더니 모두가 들고 일어나 데모를 했습니다. 절대 못하겠다고, 그러면서 목사를 비난하는 말들을 쏟아 내던 가슴아픈 기억도 있습니다. 아무도 하겠다는 사람이 없어서 결국은 포기해야 했습니다. 누가 일하기 힘든 부서에서 일하려고 하겠습니까? 교사뿐만 아닙니다. 봉사부도 그렇고, 재정부도 그렇고, 관리부도 그렇습니다. 아무도 그 일을 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자기 이름이 드러나고, 사람들에게 보이는 것에는 누구나 하고 싶습니다. 그런데 그렇게만 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교회 사역을 하려면 이 말을 경청해야 합니다.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려고 하지 말고, 교회가 필요한 사역을 하십시오. 어떤 이는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은사가 아니어서 못합니다. 맞습니다. 피아노를 못치는데 어떻게 반주를 합니까? 그런 은사가 아닙니다. 그러나 주일학교 교사, 휴지줍고, 청소하고, 밥하는 봉사자들은 누구나 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집에서 밥을 하는 주부들은 은사를 받았기 때문에 밥상을 차리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해야 할 책임이고, 가족을 사랑하기 때문에 내가 짊어지는 짐이기 때문에 기쁜 마음으로 합니다. 청소하는게 은사가 아닙니 다. 밥하는 게 은사가 아닙니다. 마찬가지로 교회의 사역도 그렇습니다. 특별한 은사가 있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가 필요한 사역에 동참해 보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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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52
    아름다운교회 Jan 15.2023 내가 선교사입니다
    특새가 끝났습니다. 새 해를 하나님과 사랑에 빠지는 것이 필요해서 이 집회를 열었습니다. 우리는 자주 리마인드를 해야 알아듣는 사람들입니다. 특별히 좋은 것들은 (이것들은 우리의 육신의 성향을 거스리는 것입니다) 잘 하고 싶지 않습니다. 마치 몸에 좋다는 것은 쓰다고 하는데 쓴 것을 못 견디는 것과 같지요. 한 주일의 예배를 대하고, 수요예배, 금요예배, 심지어 새벽기도회가 일주일에 이어 지는 것은 성도들을 얽매게 하기 위함이 아니라, 받은 은혜와 사랑을 지켜나가기 위함입니다. 자꾸만 귀찮게해서라도 들려주어야 겨우 신경을 쓰며 track에서 벗어나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기도하다가 깨달은 것은, 나는 참으로 미련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삶을 통해서 끊임없이 말씀해 오셨음에도 그때마다 깨달아 알지도 못하고, 그냥 지나쳐 왔다는 것을 어느 기도하던 시간에 알게 되었습니다. 참 미련했다 싶은 것입니다. 올 해에 우리는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를 입고자 합니다. 그리고 그 받은 은혜를 간증하며 새 노래(?)로 부르는 것을 목표로 삼았습니다. 할수만 있다면 우리 삶에서 생생하게 살아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말하고 싶습니다. 그래서 신이 났으면 좋겠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신 목적과도 부합합니다. 우리는 이 땅에 잘먹고 잘 살고, 기름지게 삶을 누리다가 따놓은 천국에 콧노래 부르면서 가도록 지어진 존재가 아닙니다. 이 땅에서는 ‘사명’을 가지고 살도록 지어졌습니 다. 잘 살기 위한 사명이 아니라, 남들로 하나님께 부요하도록 만드는 일에 우리가 부름을 받은 것입니다. 그야말로 ‘복의 통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이 흘러가는 통로로 우리를 부르신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이 사명에 투철하지 못하고, 그저 내 한몸 살기에 바쁘고, 모자란 인생으로 산다면 이 사명을 주신 하나님의 뜻과는 전혀 다른 인생을 걷고 있다고 보아도 과언이 아닙니다. 다른 사람들에게 내가 받은 복을 나누어주는 복의 전달자, 그 복은 세상의 물질의 복이 아니라, 영적인 복을 나누어주는 복의 전달자, 그는 선교사입니다. 우리의 마지막의 길은 사명을 완성하는 길이어야 합니다. 미완성으로 주님을 만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내게 맡겨진 사명의 길을 완성하여야 주님을 웃으며 맞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선교사로 사는 것, 이 말은 해외에 나가서 선교사가 되라는 말일 수도 있지만, 내가 사는 삶의 자리에서 선교사의 자세로 살아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가정의 복음화를 위한 선교사, 직장의 복음화를 위한 선교사, 학교의 복음화를 위한 선교사, 그리스도의 증인의 삶을 사는 것이 바로 선교사로 사는 것입니다. 선교사가 특별한 계급이 아닙니다. 내가 선교사입니다. 내 삶을 되도록 복음과 연결시켜서 사는 것입니다. 한 영혼을 얻기 위하여 선교사들이 얼마나 마음 졸이며, 겸손하게 사람들을 섬기는지를 생각해 보십시오. 교만해질 수 없음을 알게 됩니다. 가장 낮은 자세로, 한영혼을 얻기 위하여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우리가 선교사입니다. 돈도 그것을 위해 주셨고, 건강도 그것을 위해 주셨고, 지위와 편안함도 그것을 위해 주셨습니다. 나만을 위해 살다가 주님을 만나지 않고, 선교사로 살다가 주님을 맞이하면 주님이 즐거이 맞아 주실 것입니다. 선교주일입니다. 내가 선교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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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름다운교회 Jan 08.2023 훈련없는 군대
    우크라이나 사태가 사람들의 예상을 벗어나 장기화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전쟁의 정당성도 이해하지 못하겠거니와, 의외로 젤렌스키 대통령을 비롯한 우크라이나 국민들과 군대가 용감하게 나라를 지키고 있는데에 대해서 놀라움을 금할 길이 없습니다. 물론 서방 세계의 전폭적인 지지가 한 몫을 하고 있는 것은 분명하지만, 그렇다고 그것만이 다가 아님을 압니다. 과거 아프가니스탄의 경우에서, 미국의 절대적인 지지와 지원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아프가니스탄은 결국 실패한 전쟁으로 규정이 된 것은 허약하고 훈련없는 군대, 나약한 국민적 결단이 주된 이유였음을 상기하면, 우크라이나가 얼마나 용감하고 결단력있게 나라를 지키려는지 쉽게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습니다. 내 힘으로 나라를 지키려 는 의지가 분명하지 않고, 훈련도 되어있지 않으면 모두의 소망이 한순간에 사라 진다는 것을 가르쳐 주는 경우인 셈입니다. 21세기를 살면서, 특별히 팬데믹 이후의 삶은 되도록 안전주의나 편의주의 혹은 개인주의의 절정에 이른 것으로 여겨지면서 과연 우리 인생에 어떤 희망이 남아있는지 의아함이 남았다는 것은 너무 비관적이지 않은지 모르겠습니다. 이러 한 시대에 한 가지 현상이라고 한다면, 속박과 훈련을 싫어한다는 것입니다. 세상의 어느 누가 자기를 무엇인가에 속박당하려 하겠습니까? 자유하고 싶고, 자신의 의지대로 살고 싶은 것이 인간의 기본적인 욕구일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가 아닐 것입니다. Washington DC에 가면, 한국전을 기억하게 하는 동상들이 있습니다. 군인들이 판쵸우의를 뒤집어 쓰고 행진하는 모습인데, 그곳에 가면 이런 글이 새겨져 있습니다. “Freedom is not free” 언어유희 (word playing)이기는 하지만 가슴에 깊이 파고 들어오는 무언가의 강렬한 느낌을 받았 던 적이 있었습니다. 자유를 갈망하지만, 그 자유는 공짜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명언입니다. 새해가 시작되면서 ‘속박’이 언급되고 있습니다. 그것은 ‘훈련’입니다. 사회에 나가면, 잘 조직된 회사일수록 짜임새 있는 ‘훈련’이 평생 이루어지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한번 입사하면 그냥 먹고 사는 법이 세상에 없습니다. 교육에 교육, 또 재교육하면서 면밀하게 사회를 분석하고 훈련을 받습니다. 교회라고 다르겠습니 까? 한번 은혜받으면 평생 가는 법은 절대로 없습니다. 그 은혜를 지속하고, 교회를 성숙하게 하고 성장하게 하기 위하여서는 고도로 훈련된 성도들이 사명감과 헌신을 통해 이루어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작은 교회들일수록 더욱 그래 야 하는데, 이상하게도 작다는 이유만으로 아무런 훈련도 받으려 하지 않습니다. 만일 그렇다면 그곳은 언제나 어린아이들만 득세하게 되고, 성숙하지 못한 탓에 항상 문제를 안고 가슴앓이만 하다가 지쳐서 더 이상 앞으로 나가지 못하게 됩 니다. 은혜받으면 다 된다고요? 착각입니다. 은혜를 관리해야 하고, 더 성숙한 곳으로 나가야 합니다. 그래서 훈련은 항상 필요합니다. 새해에 제직 세미나, 리더 훈련, 말씀과 기도 훈련등이 언급되어집니다. 여기가 무슨 훈련소냐고 반문하실 분도 있습니다. 맞습니다. 이곳은 크루즈 유람선이 아닙니다. 전쟁하는 전투선에 승선해서 그리스도의 나라를 위해 싸우는 군사들입니다. 훈련되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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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름다운교회 Jan 01.2023 새 노래를 부르자
    한 해가 저물어 가고,이제는 계묘년(突卵年) 검은 토끼의 해를 하나님을 찬양하면서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지난 몇 주간은 성경의 전도서를 가지고 새벽 큐티를 진행하면서 보냈는데, 전도서에서 하는 메시지가 자꾸만 머릿속을 떠나지 않고 맴도는 것이 있습니다. 전도자는 ‘세상의 모든 것들이 헛되다’고 노래의 후렴처럼 반복하며 주장을 합니다. 그렇습니다. 참된 것이 없는 세상, 진실이 아닌 것들 속에 싸여있는 삶은 헛됩니다, 그러하기에 일의 결국을 다 듣게 된 우리가 해야 할 것이 있다면 헛된 인생을 위하여 살지 않고, 참된 진리이신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하나님을 경외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이렇게 할 때, 참된 기쁨이 있습니다. 인생의 즐거움이 거기에서 나오기에 주신 날을 감사하며 즐거움으로 살라고 합니다. 그것이 인생의 분복이라고 합니다. 헛된 것을 사는 것은 고역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인생은 고역이 아닙니다. 구원받은 사람의 감사와 기쁨의 삶입니다. 그 인생을 우리는 한 햇동안 은혜로 살았고 또 한 해를 선물로 받아서 설레임으로 문을 열고 들어갑니다. 올 한 해의 교회의 표어는 '새 노래로 하나님의 능력을 드러내라' (시40:3) 로 정하였습니다. 이것은 새벽에 강단에서 기도하면서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입니다. 그동안 우리는 기도할 시간마다 하나님께 많은 것들을 구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하나님이 역사하시는 것을 확인할 때입니다. 시편의 기자는 새 노래를 부르라고 하였습니다. 이는 새로운 악보를 만들어 새로운 노래를 부르라는 의미는 아닙니다. 찬양하는 분들은 그렇게 보고 싶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세상의 모든 찬송은 하루 지나고 없애야 합니다. 날마다 새로운 노래를 창작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제가 믿기는 여기서 새 노래인 찬송을 우리 입에 두셨다는 것은 그 다음에 이어지는 말씀인 '많은 사람이 보고’라는 말속에서 그 진의를 발견하게 됩니다. 하나님을 믿는 성도들이 하나님의 이름으로 이루어진 놀라운 역사를 찬송으로 표현하여 부를 때에,많은 사람이 하나님의 하신 일을 그 노래를 통해서 알게 되고 그 일로 인하여 하나님을 경외하고 의지하게 된다는 말씀이지요. 맞습니다. 우리 입술에 찬송이 있게 되려면 하나님의 역사를 분명히 경험해야 합니다. 홍해가 갈라지고 미리암을 필두로 하나님을 찬양했던 것도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했기 때문이며. 마리아의 찬양도 믿음으로 하나님의 역사를 고백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성도는 하나님의 역사를 찬양해야 합니다. 그러려면 내 삶에 하나님에 대한 간증이 살아있어야 합니다. 그냥 내 마음에 부적처럼 가지고 있어서 위로가 되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라는 이름만 가지고 있으면 모든 액을 물리친다는 마음의 위로는 미신에 지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살아계십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역사하고 계십니다. 우리가 눈으로 보이지 않는 세계속에서도 역사하시지만,지금 내 삶에서도 그분을 경외하며 목말라 하는 당신의 자녀를 위하여 놀라운 기적곽 같은 일을 행하실 준비를 하시고 기다리고 계십니다. 그런데 정작 성도라 부르는 이들은 하나님을 바라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삶에 기적을 만들어서라도 당신의 사랑하는 백성들을 위하십니다. 그래서 찬양이 나옵니다. 새 노래가 나옵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모르면 찬송은 유행가에 지나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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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름다운교회 Dec 25.2022 예수님의 이름, 하나님의 선물
    성탄절입니다. 그리고 한 해를 마무리 하는 마지막 주일이기도 합니다. 이런 기회가 흔하지 않은데 중요한 의미가 있는 날이 겹쳐진 것이지요. 새해를 주님의 성탄으로 마무리하는 축복된 시간앞에 서 있어서 감사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한 해를 마무리하고 새로운 한 해를 맞아 다시 주님앞에 예배하게 됩니다. 전도자는 해 아래 새 것이 없다고 하였습니다. 하지만 세상을 끊어서 볼 수 있는 것도 더 나은 미래를 준비하는 유한한 인생을 살아가는 우리에게는 한 해, 한 해를 끊어서 볼 수 있는 것도 감사한 일입니다.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실 것을 에덴동산에서부터 암시해 주셨습니다. 인간으로는 구원할 어떤 존재도 없음을 아셨기에, 하늘에서부터 이 땅에 육신을 입고 오신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지 않고서는 어떤 희망도 없다는 것을 아셨습니다. 그리고 때가 차서 이 땅에 예수님을 보내셨는데, 그 이름을 우리에게 알려주셨습니다. 그리고 그 이름속에서 예수님의 사역과 존재를 고스란히 드러내셨습니다. 그 이름은 크게 3가지입니다. 하나는 '예수'입니다. 이는 구약에서 '하나님이 구원하신다'는 '예호수아'라는 말의 헬라식 발음입니다. 즉, 예수님은 죄인인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이 땅에 오셨습니다. 사람들은 스스로가 죄인임을 알지 못합니다. 좀 나쁜 일을 하고서야 자신이 약간은 죄인임을 자각하기도 합니다만, 지옥에까지 갈 정도는 아니라고 자부하며 삽니다. 죄의 심각성을 모르는 것이지요. 죄인인데 죄를 모르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령께서 오셔서 내가 얼마나 큰 죄인인지를 깨닫게 하실 때에, 정말 우리는 '벌레'에 지나지 않을 죄인임을 알게 됩니다. 그럴 때에 비로소 예수라는 이름은 우리에게 빛이 됩니다. 우리를 그 죄인에서 구원할 오직 유일한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라는 이름만 불러도 구원의 길이 보이는 것입니다. 둘째는 '그리스도'라는 말입니다. 히브리어는 '메시야'인데, 이를 헬라어에서 '그리스도'라는 말, 즉 '기름부음을 받는 자'라는 말입니다. 세상의 메시야를 뜻하는 말입니다. 이 메시야가 이 땅에 오실 때에 마지막의 구원의 완성됨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또 하나의 이름은 '임마누엘'이라고 부르셨습니다. 이 이름이 우리에게 얼마나 큰 힘이 되는 지 모릅니다.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습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을 대면하여 보는 즉시 죽을것이라는 신앙이 있었습니다. 볼 수 없는 하나님, 그래서 인격적이지 않을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날 수 있게 하시기 위해서 '우리 곁에,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이름 '임마누엘'이라는 이름을 주셨습니다. 편광필터를 통해야만 태양을 바라볼 수 있듯이 예수님이라는 필터를 통하면 하나님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것을 어떻게 알게 됩니까? 육신이 되어 우리 곁에 계신 예수님을 보면 알도록 하셨다는 말씀입니다. 그 사건을 통해서 하나님은 그저 우주에 계시고, 우리 인간이 발버둥치면서 멋대로 사는 것이 아니라, 우리와 밀접하게 호흡하시고, 우리의 삶을 돌아보시고, 애통해 하시고, 기뻐하시고, 마치 내 피붙이처럼 모든 감정을 함께 나눌 수 있는 인격체로 우리에게 알게 하시기 위하여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것이지요. 그러고 보면, 예수님의 이름속에 모든 것이 들어있습니다. 이 예수를 믿는 자는 구원의 영광을 누리게 됩니다.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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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름다운교회 Dec 18.2022 눈 깜짝할 새
    세상에서 가장 빠른 새는 '눈 깜짝할 새'라고 non sense quiz에 나왔던 이야기 입니다. 그래서일까요? 시간은 이렇게 눈 깜짝할 동안에 빠르게 지나와서 벌써 한 해를 마무리해야 하는 시간앞에 서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생각해 보면 시간만 이렇게 눈 깜짝할 새가 된 것이 아니라, 삶의 방식 또한 너무나 빠르게 변화되는 것 같습니다. 다니엘이 예언한 대로, 많은 사람이 빠르게 왕래하고 지식이 더하는 시대가 도래하였습니다 (단12:4).얼마 전에, 집에서 쓰는 다리미가 고장 났습니다. 10년 전에 아들이 사준 다리미였는데 아내가 아주 유용하게 쓰던 것이었습니다. 바꾸어야 할 시점이 다가온 것이지요. 밤 9시가 넘어서 아마존에 주문을 했습니다. 다음 날 새벽기도회 집을 나오려고 하는데 문 앞에 벌써 소포가 와있었습니다. 이게 뭔가 싶어서 보니 어젯 밤 9시 넘어 주문한 물건이 새벽 5시도 안되어 도착해 있던 것이었습니다. 정말 미국에 살면서 변화를 실감하는 시간이었습니다. 한국에서야 워낙 빠르게 빠르게 '급행'을 좋아하던 시절이 있었지만, 미국에 와서는 느려터진 이곳 문화에 답답해 했었고, 세월이 가서 이젠 어느 정도 그 '느림'에 익숙해져 왔는데, 어느 사이에 이렇게 그 느림이 '급행'으로 바뀌어 있을 줄은 상상도 못했습니다. 세상은 이만큼 변화하고 있다는 말이겠지요. 어디 이것뿐입니까? 너도 나도 우주에 우주선을 쏘아 올리고, 무인으로 운전하는 시대가 오고, 인공지능의 발달로 인해 이제는 인공지능이 인간을 지배하는 세상을 염려하는 세상이 되었으며, 많은 음식점에서는 사람대신에 로봇이 음식을 배달해 주는 등, 사람의 할 일이 점점 더 사라지고, 인간이 만든 로봇이 세상에 가득한 세상이 멀지 않았음을 예고하고 있습니다. 앞으로 우리 자녀와 그 다음 세대가 살아갈 세대는 정말 어떤 세대가 될지 두렵기도 하고 신기하기도 합니다. 이렇게 세상이 급변하는 시기에 교회와 신앙은 어떨까요? 요즘 팬데믹의 영향의 변화를 통해 예견해 볼 때, 앞으로 지금의 신앙이라는 면은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지 않을까 하는 염려도 해봅니다. 많은 진보인사들이 진보진영을 이탈하면서 지적하는 말이 의미심장하게 들리는 것도 그러한 이유입니다. 변화를 감지하지 못하고, 자기가 비판했던 것들에 어느새 편승해서 자신도 괴물이 되어있음을 깨닫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보수도 마찬가지입니다. 자기가 괴물이 되어가는 것을 모르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이지요. 아무리 시간이 빠르게 지나간다해도 복음은 변할 수 없습니다. 왜냐면 로마서에서 지적한대로 '복음에는 생명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복음안에 생명력을 뺀다면 그것은 지식과 철학에 불과할 것입니다. 이 생명은 사람을 변화시키는 능력입니다. 베가스에 사는 많은 사람들의 인식은 '돈버는 일'에 초점이 있는 것 같습니다.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뜻대로 살 것인가에 대한 고민보다, 어떻게 하면 내가 행복하게 살 것인가에 모든 초점이 맞추어져 있습니다. 젊은이, 노인을 할 것없이 그 잣대가 '돈'입니다. 돈이 이미 우상이 된 도시에서 과연 우리의 복음이 살아날 것인지, 정말 궁금하고 염려가 됩니다. 성탄절이 다가옵니다. 이 복음안에 생명을 불어넣으실 분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를 만나지 않으면 안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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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름다운교회 Dec 11.2022 하이브리드 교회
    지나 간 몇 년동안의 펜데믹의 영향은 사회 전반에 걸쳐서 중요한 변화를 가져 왔습니다. 이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변화인데, 하지만 세상속으로 향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해야 할 교회는 이 변화를 그냥 바라만 볼 수가 없게 된 것이 사실입니다. 세상에 물들지 않으면서 세상에 복음을 전하는 방법이 무엇이 있을까를 고민할 수 밖에 없는 시간입니다. 복음은 변질되면 그 생명력이 죽습니다. 죽은 복음은 시대를 바꿀 수 없고, 사람을 바꿀 수 없습니다. 오직 복음이 살아 있을 때에야 만이 그 역할을 감당할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이 땅 에 전해진 지 수천 년이 지나면서 복음은 그 시대마다 타협하지 않고 그 생명력을 유지해 왔습니다. 물론 어느 시기에는 암울하게도 시대와 타협하고 썩은 시간도 있었습니다. 마차를 타는 시절의 감각으로 비행기를 타는 시대의 감각을 따라 잡을 수는 없다는 것을 알기에, 복음의 옷은 갈아입으면서도 복음의 본질을 훼손 하지 않는 것이 무엇이 있을지를 고민하게 되는 것이 요즘의 시간입니다. 그런 고민을 하던 중에 교회 컨설팅 기관에서 용어 하나를 던졌는데, 그것이 바로 ‘하이브리드 교회 (Hybrid church)’입니다. 알다시피, 하이브리드라는 말은 섞어 놓은 것을 말합니다. 이것과 저것의 장점을 섞어 놓은 혼합된 것을 가리키는 말인데, 교회가 offline church, online church라는 말을 사용하다가 그 둘을 혼합하여 이제는 hybrid church 라는 말을 내놓은 것입니다. 펜데믹 이후에 online 교회가 생기더니, 이제는 사람들이 교회에 발을 끊고, 온라인 교회를 드나들고 있다고 합니다. 한번 교회에 발을 끊은 사람은 이제 다시는 교회안으로 들어올 확률이 적다고 합니다. 그래서 온라인교회의 비대면 예배와 오프라인 교회의 대면 예배를 이제는 적극적으로 활용해서 교회를 나오지 않는 사람에게로 향해야 하지 않겠느냐는 현장 목회자의 고민을 염두에 둔 것이지요. 솔직히 우리 교회도 그렇습니다. 수요 예배를 현장 예배로 복귀하지 못하고 있는 시점에서 과연 현장예배를 고집하고, 나오는 극 소수의 사람들이 감동없이 드리는 예배가 아닌, 그나마 온라인의 편리함이 있어서 대면 예배에 올 수 없는 사람들이 함께 참여해서 드리는 것이 훨씬 나은 것이 아닌가 하는 고민을 해 오던 차에 이 하이브리드 교회라는 용어가 약간의 용기를 주었던 것이 사실입니다. 지금도 고민하고 있습니다. 정말 이것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인지, 이 시대 사람들의 입맛에 맞추는 것이 정말 옳은 것인지 잘 판단이 서지는 않습니다. 물론 온라인으로 하든, 대면으로 하든 수요예배를 드리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별 의미가 없을 것입니다. 어차피 안나올 것이니까요. 그나마 나올 수 있는 여건이 훨씬 합리적인 것으로 보이는 이 하이브리드 형태의 예배를 생각해 보이는 것은 어떻게 해서든 한 사람이라도 예배에 마음을 두도록 해야하는 목회자의 고민때문일 것입니다. 이제 수요 예배를 그저 몇 사람이 모이는 그런 예배가 아니라, 우리 모두가 예배라는 공간에 함께 참여할 수 있기를 바라며, 저 역시 하이브리드 교회라는 용어를 어쩔 수 없이 받아들여야 하는가 봅니다. 어차피 시대의 변 화가 시작되었으니, 그 변화를 수용하면서 조금더 적극적으로 앞으로의 일을 대처하는 것이 타당하다 보이는데, 하나님!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알려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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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름다운교회 Dec 04.2022 함께 할때, 가장 아름답습니다
    요즘 2022 Qatar Worldcup의 열기가 지구촌의 추위를 막아주는 것 같습니다. 한국이 기사회생으로 16강에 진출하는 기적이 일어나는 것을 보면서 저마다 기쁨과 설레임으로 잠을 설치기도 하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이 경기들을 보면서 느끼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우리 나라 대표팀의 주장으로 활동하는 손흥민 선수, 축구의 본고장 영국 프리미어 리그에서 뛰는 선수인데 세계적인 지명도가 있어서 어디를 가도 world class대접을 받습니다. 그런데, 그가 월드컵을 한국 대표 선수 가운데 한 사람으로 국가의 부름을 받아 뛰고 있습니다. 그런데 지난 간 몇 경기를 보면, 그가 정말 world class선수인가하는 의심이 들만큼 괄목할 만한 활동을 하지 못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온 국민과 세계가 손흥민 선수의 경기를 관심있기 지켜보고 있는데 정작 본인은 몇 경기를 치루는 동안 그의 존재 감을 마음껏 드러내주지 못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왜 세계적인 대회에서는 잘 뛰는데, 왜 대표팀에서는 그만한 빛을 발휘하지 못하나 싶어서 생각해 보았습니다. 순전히 제 개인적인 의견으로는 이런 결론을 얻었습니다. ‘아무리 훌륭한 선수라 할지라도 함께 뛰어주는 선수들 가운데 받쳐주는 사람이 없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혼자 날고 긴다고 할지라도 축구는 옆에서 함께 뛰어주고, 같은 기량으로 움직여주는 선수가 곁에 있을 때, 서로가 빛을 보게 되어있다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러한 점은 교회 공동체에서도 적용될 수 있는 점입니다. 한 두 사람이 아무리 잘 한다할지라도 곁에서 함께 뛰고, 돕고, 움직여주는 같은 기량의 동역자들이 없이는 한계가 있을 수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교회는 슈퍼맨이나 슈퍼우먼이 움직이는 장소가 아닙니다. 아무리 작은 일을 맡아도, 작은 것을 감당해 주는 사람과 큰 일을 감당해 주는 사람이 함께 할 때에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십니다. 바울 사도역시 은사를 말하는 고린도전서 12장에서 우리 몸에는 수많은 지체가 있다고 말합니다. 한 지체가 다른 지체에게 너는 덜 중요하니 몸이 아니라고 말할 수 없다고 합니다. 더 나아가 몸의 약한 지체가 더 소중하다고 말합니다. 공사를 해보아도 그렇습니다. 대못만 역할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손톱만한 작은 못이 요긴하게 쓰일 때가 있습니다. 누가 더 중요하고 덜 중요하느냐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함께 어우러지는 것이 중요합니다. 왜냐면 교회는 건물이 아니라, 유기적인 관계를 이루는 ‘그리스도의 몸’이기 때문입니다. 이 ‘함께임’의 중요성을 모르면 그 공동체는 질척거릴 수 밖에 없습니다. 나 한 사람이 역할을 피하면, 다른 지체들이 힘들어 합니다. 그만큼 교회 공동체에서는 피해가 큽니다. 교회 성장을 다루는 학자들은 교회 구성원의 20%가 일을 하고, 나머지 80%는 쉬는 구조에서 이 비율을 바꾸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그래야 교회가 성장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목회자들은 이 비율을 바꾸어 보려고 수많은 노력을 합니 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의 마음을 흩어놓는 사탄의 방해로 인하여 이 문제는 영원한 숙제로 남을 때가 많습니다. 벌써 12월이 되었습니다. 한 햇동안 참 많은 일들이 지나갔습니다. 어느 때 보다도 많은 사역이 이루어졌고, 많은 열매 또한 거둘 수 있었음은 방관하던 사람들 때문이 아니라, 함께 했던 동역자들 때문에 이룰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과 함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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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름다운교회 Nov 27.2022 말을 잘해야...
    한국의 정치가 주는 유치함에 마냥 실소와 가슴앓이를 하는 것은 저 뿐만이 아닐 것입니다. 국민의 세금으로 일하는 국회의원들을 보면, 과연 저 사람들에게 나라의 미래가 있을 것인지 걱정이 될 때가 참으로 많습니다. 그중의 하나가 유치한 말장난과 함께 도대체 나라를 위해 하는 일이 뭘까하는 안타까움이 정말 많습니다. 좀더, 나라와 미래를 걱정하면서 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앞에 있는 ‘적’을 향한 무조건적인 디스일 뿐입니다. 이는 여,야를 막론하고 마찬가지입니다. 이런 일들 가운데 요즘 내 생각을 잡는 것 하나가 있습니다. ‘유감표명’입니다. 늘 의구심을 가지고 있고 불만이 있는 것이 바로 ‘유감’이라는 표현입니다. 정치권이나 외교가에서만 쓰는 어법인 것 같은데 그 사용법이 너무나 잘못되었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습니다. 정치언어, 외교언어에 점잖은 표현으로 한다고 사과 하는 것을 ‘유감’을 표명했다고 지금까지 사용했습니다. 그런데 그 말을 들으면 사과를 받았다는 생각보다는 오히려 화가 날 때가 많이 있습니다. 본인들은 사과나 잘못에 대한 인정이라고 하지만, 정작 사과를 받아야 하는 대상은 오히려 찜찜한 마음을 남기는 것이 대다수의 생각일 것입니다. ‘유감(遺憾)’이라는 사전적 의미는 ‘마음에 남아있는 섭섭하거나 불만스러운 느낌’입니다. 여기에는 사과라는 의미가 전혀 들어있지 않습니다. 그런데 오직 정치권이나 외교권에서만 그렇게 되지 않아서 섭섭하다는 말을 사과로 받아들이는 이상한 어법이 형성되었습니다. 우리가 어떤 일로 상대방에게 사과할 때에 만일 외교/정치언어로 ‘유감이다’라고 하면 진정한 사과로 받아들이기 어렵습니다. ‘미안합니다. 죄송합니다. sorry’라고 분명한 메시지를 내야 합니다. 그런데 어정쩡하게 사과합니다. 사과도 아니고, 사과가 아닌 것도 아닌 것, 이렇게 되면 오히려 더 관계만 나빠집니다. 사과를 받는 사람은 받고도 찜찜합니다. 정말 ‘유감(遺憾)’입니다. 교회 생활에서도 그렇습니다. 인간은 어쩔 수 없이 관계중심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싫든 좋든 우리는 공동체 생활을 하기에 관계를 맺으며 살 수 밖에 없 습니다. 그 관계가 늘 좋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런데 때로는 우리의 말이나 표정, 행동으로 관계를 어렵게 하는 일들이 있을 수 밖에 없습니다. 그것이 실수 이든 의도이든 그런 일이 벌어지면 관계가 깨어질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럴 때, 우리는 빨리 깨달아야합니다. 무엇이 이렇게 관계를 어렵게 했는지 깨달아야 합니다. 그리고 문제의 원인을 다른 사람에게서 찾기 보다 내 안에서 찾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늘 상대방의 티끌속에서 대들보를 찾으려는 잘못을 범합니다. 저 역시 그렇습니다. 누군가 정말 속이 상한 이야기를 했습니다. 들을 때는 화가 머리끝까지 올라왔습니다. 뭐 이런 인간이 있는가 싶을 정도로 화가 나서 상처가 되었습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생각하게 됩니다. 뭐가 그렇게 나를 보게 했을까? 나는 잘했다고 생각했는데, 혹시 내가 놓친 무엇이 있는 것은 아닌가 나를 반성하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앞에 정직할 수 밖에 없습니다. 사람은 속일 수 있어도 하나님은 속일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 하나님앞에 우리의 메시지가 분명해야 하지 않을까요? 회개도 아니고, 회개가 아닌 것도 아니게 접근한다면, 영원히 관계를 돌이킬 수 없습니다. 우리의 말 정확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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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름다운교회 Nov 20.2022 어느 때 가장 감사할까요
    지난 한 달동안 우리는 정말 정신없이 달려왔습니다. 14년째 이어지고 있는 다니엘 세이레 특별 새벽기도회는 우리의 육신을 지치게 하였지만, 하나님과의 관계를 더 튼튼히 하는 영적 체력단련장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올 해엔 이 특.새를 바로 이어서 한 생명을 주님께 안내한 안드레 정신을 가지고 새생명 축제를 위해 영적 긴장감을 가지고 달려왔습니다. 그러고 보니 벌써 한 해의 마무리를 해야하는 시간앞에 서 있게 되었습니다. 감사의 계절입니다. 밀레의 ‘만종’이라는 그림속에서 부부가 손을 모으고 기도하고 있는 모습을 봅니다. 장소는 농촌의 밭입니다. 아마도 일하고 있는 중이었나 봅니다. 바쁜 하루의 일과에서도 손을 모으고 기도할 수 있는 시간이 있다면, 그리고 그 기도는 감사의 기도였을 것을 생각해 봅니다. 아무리 바쁘더라도 인생은 기도하는 시간이라는 그 멈춤이 필요 할 때가 있습니다. 너무 지나치게 빨리만 달려와 어디에 서 있는 지를 생각해 볼 시간이 필요한 것이지요. 감사의 계절에 그런 멈춤으로 한 해를 돌아보는 기회를 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리며 멈춰섭니다. 인생이라는 밭/길에는 두 가지 돌이 깔려있다고 했습니다. 원망/불평이라는 돌과 감사라는 돌이 그것입니다. 그 두 돌은 어디에나 깔려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바닥에 널려있는 두 가지 종류의 돌을 담는다고 합니다. 어떤 이는 원망과 불평이라는 돌을 들고, 어떤 이는 감사라는 돌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들려진 돌처럼 삽니다. 어떤 분들은 정말 원망과 불평으로 가득한 인생을 사는 분들이 있다는 것이 놀랍습니다. 물론 감사를 안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감사하다가도 어느 순간에는 조건이 조금만 달라져도 곧바로 다른 돌을 꺼내드는 사람이 있습니다. 또 어떤 분들은 원망과 불평의 돌이 감사의 돌보다 많음에도 불구하고 항상 꺼내드는 것은 감사입니다. 결국 자신의 결정에 달려있음을 알게 됩니다. 어느 돌을 들 것이냐는 것은 자신의 결정입니다. 사실 원망하고 불평할 시간에도 감사하기로 결정하면 감사가 나옵니다. 어떻게 하기로 마음먹었느냐는 것입니다. 우리의 얼굴은 카멜레온처럼 바꿀 수 있는 힘이 있습니다. 싸우고 있다가도 누군가 귀중한 분이 오면 안싸운척 할 수 있습니다. 마음이 불편함에도 그 사람에게 그렇지 않은 척하는 것은 그것이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 주는 것이지요. 어떤 상황이 오든 어느 길을 선택할 지는 본인의 결정에 달려있는 것입니다. 이 감사의 계절에 무엇을 감사하겠습니까? 형식적인 감사가 아닌, 온 마음으로 할 수 있는 감사는 무엇입니까? 사람이 아픈데 어떻게 감사하냐, 불행한데 어떻게 감사하냐, 고통스러운데 어떻게 감사하냐, 그렇게 반문할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가운데서도 감사하기로 마음먹으면 바뀔 수 있습니다. 왜냐면 고통 때문이 아니라, 그 고통을 다루시는 분의 의도가 무엇인지 알기 때문입니다.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는 고백은 특정한 어느 분에게만 일어나는 것이 아닙니다. 감사하기로 결정하는 사람에게 일어나는 축복입니다. 결국 감사는 어려울 때 하는 감사가 진정한 감사입니다. 좋은 환경속에서 감사못할 사람은 없기 때문입니다. 지금 감사하십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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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름다운교회 Nov 06.2022 새 생명 축제
    이제 새 생명 축제가 한 주간 앞으로 다가왔습니다. 교회를 사랑하는 분들은 이 축제를 위하여 마음을 기울이며 노심초사하면서 한 생명을 찾기 위하여 마음을 갖고 기도하고 돌아다니고 있습니다. 참 귀하고 사랑스러운 일입니다. 제가 목회를 하면서 몇 차례 새 생명 축제를 시도해 보았습니다. 하지만 보기좋게(?) 핑계만 있는 행사에 그쳤던 것과 그때마다 좌절과 자조스러운 한탄으로 남았던 것을 기억하는데, 그 이유가 무엇이었을까요? 그것은 리더 스스로가 그 사명을 잃었기 때문입니다. 리더라고 하면 교회의 중추신경입니다. 그런데 그 중추신경이 마비가 되어 교회와 한 마음이 되지 않았는데 어찌 그 일이 잘될 수 있었겠 습니까? 그 리더의 한 사람이 목사입니다. 일을 계획하고 진행하면서 목사 스스로가 찾아가지 않고, 남들이 해주기를 기다렸기 때문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리더 스스로가 열정이 머리열정, 가슴열정에 그쳤다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제 스스로가 달라졌음을 깨닫게 됩니다. 전도하러 밖으로 돌아다니면서 제 눈이 달라졌고, 마음이 달라졌기 때문입니다. 그동안에는 이런 마음이 있었습 니다. 예수를 오래 믿었기 때문에 주변에 안믿는 친구들이 없다고만 생각했습니 다. 그래서 전도할 대상이 없다고 자연스럽게 포기하게 되지 않았나 싶습니다. 그런데 전도하러 여기 저기 돌아다니다 보니, 그 생각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발견 하였습니다. 정말 수많은 사람들이 교회를 나가지 않고 있는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한인 인구가 늘어나는데도 불구하고 왜 교회에 나오는 숫자는 늘어나지 않는 것일까요? 한인만 영혼이겠습니까? 이제는 베가스를 선교 전초기지로 삼기 위한 선교비전을 갖고 보니 온통 구원받아야 할 영혼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이것을 보게 된 것입니다. 내 주변에 전도할 대상이 없다는 말은 내가 주님의 마음과 전도의 마음으로 내 주변을 보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냥 살아가야 할 환경으로만 보았지, 주님의 마음이 그들에게 있다는 것을 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곁에 대상자들 이 주변에 널려있어도, 그저 관계만 유지하려고 하지, 전도하려고 하지 않았습니 다. 이것은 심각한 오류입니다. 돈에 관심이 있는 사람은 어떻게 하든 돈이 보입니다. 심지어 시간과 사람도 돈으로 보일정도입니다. 여행에 관심이 있거나, 요리에 관심이 있거나, 무엇인가에 관심이 있으면 온통 그것과 마음이 밀착하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의 마음이 예수님의 마음, 한 영혼을 구하기 위하여 십자가를 지셨던 주님의 마음으로 본다면 전도 대상자는 지금도 우리 곁에서 모래와 같이 있습니다. 이것을 보느냐 못보느냐의 차이입니다. 영혼에 대한 관심입니다. 다음 주에는 그동안 마음을 기울였던 새생명 축제의 날입니다. 한 사람이 오든, 열 사람이 오든, 50명이 초청에 응하든 중요한 것은 우리의 마음이 얼마만큼 영혼 을 향한 마음을 가졌느냐입니다. 이 일을 통해 우리 교회가 얼마나 숫자가 늘어 나느냐가 관심이 아니라, 우리 마음에 영혼을 향한 열정을 회복하느냐가 더욱 중 요합니다. 우리의 할 일은 전하는 것이며, 자리를 채우는 것이며, 그 사람들에게 구원의 선물을 나누어 주시는 분은 성령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할 일도 하지 않고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는 것은 또다른 영적 교만과 게으름일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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