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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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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름다운교회 Sep 25.2022 아는 만큼 보입니다
    베가스에 있는 대학으로 전도를 위해서 일주일에 두 번을 다니게 되었습니다. 느즈막한 나이에 자녀들과 같은 또래의 학생들과 마주 대한다는 것이 멋쩍어 보이기는 하지만, 이들 중에 주님이 찾으시는 사람들이 있음을 믿으며 좌충우돌 하면서 다니고 있는데 이 사역을 마치고 나면 뿌듯한 기쁨이 가슴에 차고, 복음의 미래에 대해서 찐한 미소가 떠오름을 느끼고 있습니다. 참 감사한 일입니다. 이렇게 대학을 다니다 보니 한 가지 드는 생각이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배움 을 위해서 많은 노력을 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여기저기에 배움의 도전을 하도록 격려하는 수많은 안내판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생각보다 기회가 눈앞에 더 가까이 왔다는 표현에서부터 용기를 내어 도전해 보라는 희망의 메시지들 이 여기 저기 눈에 띄였습니다. 제 자신을 들여다보았습니다. 30세 초반에 미국으로 배움의 길을 두려운 마음으로 떠나올 때가 생각이 났습니다. 한 가정의 가 정이 되고, 목회 초년생의 시절에 청운의 꿈을 품고 미국에 발을 들여놓았지만 사전에 준비된 것이 없었기 때문에 적지않게 언어적인 고생을 했던 기억이 납니 다. 그 짧은 영어로 20년간의 이민생활을 더듬거리며 해 왔다는 생각이 나면서, 영어도 아는 만큼 기회가 주어지고 길이 보임을 직감하게 되었습니다. 영어가 되려면 우선 어휘실력이 늘어나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유치원/초등생 수준의 영어에서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영어가 제대로 되지 않으니 손해 보는 일도 많 고 푸대접받는 일도 많습니다. 영어가 되면, 이 나라에서는 정말 많은 혜택을 누리며 살 수 있습니다. 하고 싶은 것들을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기회와 여건을 나라가 준다는 것을 보게 됩니다. 아는 것이 그야말로 힘입니다. 영어가 되면 얼마 나 자유스러운지 모릅니다. 하고 싶은 공부들, 배우고 싶은 기술도 얼마드니 충족할 수 있는 기회가 이 나라에서는 제공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이게 안되니 차 려진 밥상도 먹을 수 없게 된 것이지요. 세상의 배움의 세계도 그런데 영적 세계는 어떤가요? 하나님의 은혜의 세계를 아는 만큼 자유함이 있습니다. 풍성한 은혜가 있습니다. 무궁무진한 보배들을 누릴 수 있습니다. 그것을 볼 수 있는 힘이 있어야 합니다. 이러한 은혜는 아는 만큼 보이게 되어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 세계에 입문조차 하지 못하고, 그저 교회의 마당만 밟고 갈 때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저 주일예배에 한번 빼꼼하게 들여다보고, 한 주 내내 아무런 은혜의 통로를 다니지 못하고, 세상에서 이러 저리 휘몰아 치다가 다시 주일에 잠깐 교회에 들러서 갑니다. 그러니 그 은혜의 세계를 다 잊고 삽니다. 이러한 우리의 삶의 패턴은 곧 얼마지 않아 습관적 교회 생활에 빠지고 맙니다. 은혜의 세계를 헤엄쳐 깊은 바다 한 가운데를 걸어야 하는데 밀려오는 파도가 겁나서 들어갈 수도 없습니다. 그 풍성한 은혜의 바다로 나아가려면 알아야 합니다. 그 맛의 깊이와 넓이와 높이를 경험해야 합니다. 그렇게 보이면 또 다른 창공이 보입니다. 하늘 위의 하늘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알아야 합니다. 배워야 합니다. 알고 배우는 것은 눈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삶에 녹아나야 합니다. 은혜가 삶에 녹아난 나를 볼 때까지 우리는 앎에 힘을 써야 합니다. 주님을 알기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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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36
    아름다운교회 Sep 18.2022 이삿짐
    라스베가스로 이민 온지가 벌써 20년이 되었습니다. 목사라는 특성상 이삿짐속에는 아무래도 연구용 서적과 공부한 것들의 자료가 제법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한국에서 미국으로 그리고 다시 한국으로 갔다가 다시 미국으로 와야 했으니, 태평양을 건너기를 몇 번 한 것이지요. 나를 따라 가족들은 물론이거니 와 덩달아 살림살이와 목회자료들이 태평양을 건넌 것입니다. 이러한 자료들은 목회와 신학을 하는데 중요한 것들이기에, 어디를 가든 따라다녔습니다. 읽고 공부한 것들이 아까워서 가지고 다녔던 수많은 책들과 바인더들이 얼마나 많은지, 제법 버렸다하는데도 어느 새 보면 더 늘어나 있습니다. 나이를 먹는 만큼 말이 지요. 그런데 세상이 많이 바뀌었습니다. 이제는 IT산업의 발달로, 종이책이 사라 지고, 디지털 세계가 열리면서 책을 들여다 보는 기회가 적어지게 되었습니다. 그러한 여파와 함께 나의 게으름으로 20년동안 미안하게도 박스에서 빛도 못본 채 창고에 잠들고 있었던 책과 바인더들을 이번 기회에 완벽(?)하게 쓰레기 처리를 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우선은 Downsizing을 하는 장소에는 여유공간이 하 나도 없을 뿐만 아니라, 이제 20년간 안 열어본 박스에서 새롭게 책을 꺼내본다 는 일은 없다는 판단이었습니다. 이것을 누누이 아내가 지적했음에도 불구하고 아까운 생각에 치우지도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어차피 못가져갈 형편이어서 버릴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러한 자료들을 쓰레기통으로 집어 넣으면서도 그 중에 몇 자료들은 차마 버리지 못하고 다시 꺼내들어서 새롭게 박스에 넣는 내 모습을 또 발견합니다. 그러면서 깨달은 것이 있습니다. 웬만한 것은 버리는데, 차마 이것은 버릴 수 없는 것들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사료의 가치가 크다는 것, 아직은 그래도 읽을 가치가 있다는 것, 이런 좋은 책들과 자료는 버릴 수 없다 는 생각에 또 다시 쓰레기에서 서고로 다시 분류가 되었습니다. 이렇게 이삿짐을 정리하다가 보니,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우리 인생도 그런 것이 아닐까, 나 스스로는 물론이거니와 만나는 사람들, 삶의 가치들, 수많은 것 들이 우리 주변에 머물러 있는데, 이사하는 날이 우리에게 찾아오면 이와같은 일 을 반드시 해야 하는 것이지요. 아낌없이 버릴 수 있는 것들이 (사람, 물건, 관계 등) 있습니다. 쓸모없다고 이미 판단한 것이지요. 버릴까, 아니 좀 아까운데? 하는 것들도 있습니다. 버리기는 아깝고, 두기에는 선뜻 내키지 않는 것들도 있습 니다. 그러나 그 중에서도 정말 버릴 수 없는 것들이 있습니다. 이것만큼은 꼭 가져가야 해, 이것만큼은 어떤 희생을 치루어서라도 보관해야돼, 뭐 이런 것들이 있습니다. 어느 것이 보배일까요? 많은 분들이 자신이 썼다고 하는 책들도 받아 보았습니다만 미안하게도 이번 정리 대상에 포함된 것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인생은 모두가 쓸만한 것들이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렇지만 그럴 수만도 없는 것이 인생이기에 보배로운 것들도 만나지만 쓰레기 같은 것들도 만날 수 밖에 없습니다. 이러한 생각에 미치자 참으로 죄송한 것들이 많습니다. 내가 남에게 아낌없이 버려도 좋을 대상으로 산 것도 있었을 것입니다. 만남 하나 하나가 귀하고 소중합니다. 아까운 시간과 장소를 낭비하지 않는 만남이 있기를 이젠 더욱 바랍니다. 주님께도 나는 어떤 존재일까요, 죄송함이 앞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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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35
    아름다운교회 Sep 11.2022 Credit Score
    미국은 신용(Credit)사회라고 합니다. 이것은 단지 credit card의 사용을 말하지 않습니다. 그 사람이 reliable한 사람인지를 측정하는 기준을 말합니다. 그 사람이 얼마나 책임감(reliability)이 있느냐는 무엇으로 측량하겠습니까? 방법이 없습니다. 그런데 미국은 이것을 계량화하여 사람들의 신용평가의 등급을 매겨놓았습 니다. 그래서 1-850점까지의 수치를 정해놓고 높은 점수가 나올수록 신용이 좋다고 인정합니다. 점수가 높아진다는 것은 그 사람이 그만큼 믿을만한 사람이 다는 것이고, 이런 사람들에게는 은행에서 우대를 해줍니다. 심지어 돈을 빌리거 나 Mortgage를 이용할 때에 남들은 상상도 못할 낮은 이자율로 혜택을 줍니다. 이것은 단지 은행뿐만 아닙니다. 모든 거래에서도 credit score가 낮으면 웃돈을 내야 하고, 더 많은 돈이 듭니다. 그리고 심지어 거절되어 일을 하지 못하게 될 때도 참 많이 있습니다. 그래서 미국에서는 신용관리를 철저하게 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삶을 책임감있게 살았다는 평가이며, 편리함이며, 유익이 따르기 때문에 이것을 잘 유지하기 위하여 각고의 노력을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것이 단지 경제적 이익의 평가에만 그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사람의 삶의 습관과 책임감과도 직결되어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신용 점수가 낮은 사람들은 대체적으로 책임감이 떨어집니다. 약속을 잘 지키지 않는 다던가, payment를 신경쓰지 않는다든가, miss하는 일은 없어도 날짜를 어기는 일은 자주 한다는가, 남들과의 관계에 그리 신경을 쓰지 않는 습성이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반대로 credit score가 높은 사람들은 자신의 말과 행동에 책임을 지려는 성향이 강하고, 계획성있게 일을 하는 등 자신의 삶을 management하는 능력이 있다는 것이 일반적인 분석입니다. 생각해 보면 그것은 ‘책임성’과 관련이 있어보입니다. 책임감이 강한 사람이 대체로 크레딧 관리를 잘하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그래서 미국에서의 삶은 남들과의 관계 혹은 자신과의 책임성을 말해주는 이 credit score를 생명처럼 다룹니다. 우리는 이처럼 이 사회와 타인에 대한 책임감을 공고하게 하기 위하여 수많은 노력과 주의를 기울입니다. 그것이 남들에 대한 나의 신용이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같은 삶을 우리는 하나님께 그리고 교회와 성도들에게도 적용하는 가 하는 것입니다. 그럴 리가 없지만 만약, 하나님께서도 신앙 신용평가 기관을 운영하셔서 1-850점까지 점수를 매겨서 우리의 신앙 credit을 관리하신다고 한다면 과연 우리는 몇 점을 받을 수 있을까요? 그리고 그 점수를 가지고 하나 님께 기도(?)라는 것을 통해서 대출같은 응답은 받으려 한다면 과연 우리는 응답을 잘 받을 수 있을까요? 만일 신용이 부족해서 봉사점수를 더 요구하고 다른 사람들의 cosign을 요구받아야 하는 경우는 없을까요?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우리는 이렇게 신용관리를 철저하게 하면서도 하나님을 향하여서는 ‘사랑의 하나님, 용서의 하나님, 자비의 하나님’이라는 이유로 신경조차 쓰지 않는 우리의 모습을 발견하게 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노력이나 어떤 보상을 바라지도 않으십니다. 그러나 한가지는 요구하실 것 같습니다. ‘내가 너에게 성실(faithful)하다 면, 너는 나에게 성실하니?’ 하나님께 향한 나의 신용점수는 몇 점되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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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34
    아름다운교회 Sep 04.2022 이츠하크 (이삭)
    아브라함이 99세에 그토록 원했던 아들에 관하여 하나님의 응답을 구체적으로 받았습니다. 그의 아내 사라가 90세 때의 일입니다. 하나님께서는 25년을 기다리 며 지쳐 포기하고 싶을 즈음에 드디어 아들을 주시고자 하신 것입니다. 이 말을 듣고, 아브라함도 그의 아내도 ‘웃었’습니다. 웃었다는 말은 원어로 ‘이츠하크’라 는 말입니다. 왜 웃었을까요? 실소의 웃음이었습니다. ‘아니 어떻게 젊은 나이도 아니고 100세에 아들을 가져?’ 뭐 이런 생각에서였을 것입니다. 이 말은 믿을 수 없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웃었습니다. 그건 말이 그렇지 불가능하다고 여겼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두 사람이 웃은(이츠하크) 이 일로 인하여 그들의 아기 이름이 ‘이삭’(이츠하크, 웃었다)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도 웃겼을까 요? 그런데 이 웃음은 비관이나 실소 혹은 비웃음의 웃음이 아니라 ‘진짜 웃음 (이크하크/이삭)’이 되게 하셨습니다. 이들이 사실 1년뒤에 이삭을 선물로 받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과 사라도 웃었다는 의미로 ‘이츠하크(이삭)’이라 하였습 니다. 그런데 그 의미는 전혀 다른 것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이 못믿어서 실소의 웃음으로 웃은 반면에 하나님은 참된 웃음으로, 기쁨과 즐거움의 웃음으로 ‘이삭 (이츠하크)’를 사용하신 것입니다. 이 word play는 우리 인생의 역전을 꾀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설명하는 단어이기도 합니다. 사실,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다 고 말하지만, 하나님의 존재를 믿을 뿐, 하나님의 하시는 놀라운 기적과 같은 일 들을 믿지 않는 것 같습니다. 말하자면, 우리 아버지가 있다는 것은 아는데, 그 아버지의 능력은 우리의 경험에 의해서 천차만별의 경험을 하는 것과 같습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아버지는 ‘전능’ 그 자체입니다. 말 한 마디면 다 들어주시는 분으로 이해하고 있고, 다른 어떤 이는 아버지의 무능과 폭력 그리고 상처로 인하여 아버지의 존재는 인정하면서도 그의 능력은 부정하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지극히 세상적인 이해입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시냐를 드러내는 곳이 바로 성경이며, 그분의 능력을 설명하는 것이 ‘신학’입 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 분을 믿음으로 역사가 이루어집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은 완벽해서 하나님께 인정을 받은 것이 아닙니다.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도 그는 수없이 의심했습니다. 그러나 결국은 믿음으로 돌아옵니다. 얕은 믿음으로 시작한 일들이, 하나님의 웃음이 되어 우리에게 돌아 올 때가 있습니다. 우리의 얕은 믿음이지만, ‘재대신 화관’을 씌워주고, ‘슬픔 대신 찬송’을 부르게 하십니다. 우리의 약점과 아픔을 유익한 것으로 바꾸어주시 는 분이 우리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믿어야 합니다. 인생역전을 통해 일하시는 하나님은 얼마든지 기쁨의 이삭(이츠하크/웃음)으로 바꾸어 주십니다. 우리가 읽는 토저 목사님의 저서 ‘습관적 신앙에서 벗어나라’는 책에서 습관적 신앙에서 벗어나려면 ‘포기, 집중, 매료의 법칙’을 사용해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수십년 믿은 신앙이 아직도 다이나믹하지 못하다고 한다면 습관에 빠진, 형식적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지 살펴보아야 합니다. 이삭을 만들어 내는 능력이 하나님 께 있음을 알고 미지근한 신앙의 자리에서 일어나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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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33
    아름다운교회 Aug 28.2022 예수믿는 사람의 친절
    연로하신 어머니의 일로 관공서를 다녀왔습니다. 90세를 넘기신 분이라 누가봐 도 Walker를 의지하며 걷는 노인임을 알아차릴 수 있었습니다. 우리가 알다시피 미국의 관공서에 출입하면 긴 줄은 쉽게 예상되는 일입니다. 비록 노인을 모시고 가는 일이지만 긴 줄에 많은 시간과 불편을 각오하고 관공서를 다녀왔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긴 줄이 이미 건물 밖까지 서있어서 오늘은 고생좀 하겠다 싶었습니다. 비록 예약을 하고 갔어도 그게 어디 쉬운 과정이 없어서입니다. 그런데 경비원의 도움으로 그 긴줄을 패스하고 앞으로 가서 접수를 할 수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몇 십분을 기다려 창구 담당직원에 갔는데, 형식적인 대화가 오간 다음에 잘못된 몇 부분을 수정하고 마지막에 사진을 찍는 일이 남게 되었습니다. 역시 그곳에도 긴 줄이 이미 서 있어서, 어머니를 창구 가까운데 앉히고 맨 뒤에 줄을 서서 잠시 기다리는데, 이전의 창구담당 직원이 오더니, 왜 그 뒤에 서 있느냐, 맨 앞으로 불러세우면서 그 긴 줄을 패스하도록해 주었습니다. 그 때문에 그야말로 1-2시간은 절약할 수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 보니, 사진 찍는 곳과 창구 직원이 있는 거리는 그 큰 건물의 끝과 끝이 다른 곳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그 긴 줄 뒤에 서 있는 것을 보았는지, 이 끝까지 달려와서 장애 혹은 경로우대를 하는 친절을 베풀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맨 뒤에서 맨 앞으로 나오고, 행동이 느린 어머니, 손이 떨려 필기도 못하고, 사진 찍는 동안 옷매무새 와 머리를 정리해 드리는 과정을 보던 사람들의 표정에서 한심하다든지, 짜증스러운 표정이 없이 마치 당연하다는 듯하게 바라보는 사람들의 얼굴에서 보이지 않는 이해와 친절을 보는 것 같았습니다. 친절한 공무원들과 시민들에게 새삼 고마운 마음이 들었습니다. 이것이 미국이구나, 감탄스러움이 흘러나왔습니다. 성경에서는 성령의 열매가 나옵니다. 성령을 받으면 은사로서의 열매가 밖으로 보이고, 안쪽으로는 성품의 열매가 맺어집니다. 그 중의 하나가 바로 ‘친절’입니 다. 예수믿지 않는 세상 사람들도 성령의 은사가 아닐지라도 가지고 있는 ‘친절’ 이라는 사회적 합의나 마음속 성품으로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를 믿는 사람들은 어떨까 싶습니다. 앞의 공무원은 해주지 않아도 되는 친절을 보여주며 감동을 주는데, 나의 친절은 의무적 친절은 아닐까, Minimum에 그친 친절을 보이면서 나는 Maximum 친절을 보이고 있다고 하는 것은 아닐까 돌아보는 기회가 되었습니다. 해야될 친절을 보이는 것은 감동을 줄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지 않아도 되는 친절을 베풀 때, 아니 내가 해야 할 친절을 넘어서 감동을 줄 수 있는 친절을 내어줄 수 있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교회에서도 가족안에서도 직정안에서도 예수 믿는 사람들은 이 친절이 몸에 배어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곧 배려이고, 사랑이고, 이해입니다. 이 친절은 자기 중심의 인간에게는 기대 할 수 없습니다. 이타적 사랑을 하는 사람에게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세상은 자기 중심적인 이해속에서 달라고 하고, 받기에 익숙해져 있습니다. 예수를 믿는 우리에게 이 ‘친절’이 없다면 주님의 사랑을 모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 다. 그 친절 또한 Minimum이 아닌 Maximum이 될 때 주님이 기뻐하실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믿으니 이를 의로 여기신 것처럼, 우리를 기뻐 받으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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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32
    아름다운교회 Aug 21.2022 군계일학은 최선이 아닙니다
    꿩대신 닭이다. 용꼬리보다 뱀머리다. 뭐 이런 말들을 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무엇인가 대체재를 생각하면 위로삼아 하는 말일 수도 있지만, 우리 삶에서 가끔은 이런 말들의 진리(?)스러움을 체험하게 되는 일도 있습니다. 인간은 끝없이 비교하며 삽니다. 좋은 차를 갖고 싶다. 좋은 집에 살고싶다. RV 하나 갖고 싶다. 보트를 타는 인생이 좋다. 해변에 집을 짓고 싶다. 뭐 이런 소망이 이루어진다고 해서 과연 열들감이 사라질까요?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언젠가 바닷가에 간 적이 있습니다. 항만을 돌아보다가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기에 자그마한 낚싯배를 가진 사람은 세상의 부러움이 없을까? 바고 그 옆에 정박해 있는 으리으리한 요트를 보면서 자신의 자그마한 낚싯배가 초라해 보이며 열등감을 느끼지는 않을까? 맞습니다. 우리는 끊임없이 남들과 나를 비교하면서 스스로 열등간에 빠지는 일이 얼마나 많습니까? 세상에서 가장 열등의식이 심한 곳이 서울대와 하바드 대학에 다니는 사람이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최고의 학부를 다니면 자랑스럽게 우월감에 사로잡혀 살 줄 알았는데, 그곳에도 뼈저리게 열등감을 느끼는 사람이 수없이 많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다가 보니, 화려한 곳에 가서 초라하게 느끼면 사는 것 보다는 초라한 곳에 가서 화려한 조명받고 사는 것이 낫다는 것도 전혀 틀린말도 아닙니다.군계일학이라는 말도 그렇습니다. 수없이 널려있는 닭들의 세계에서 돋보이는 학이 나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듭니다. 그 한 사람은 그 세계속에서 눈에 띈 인생을 살 수 있고, 남들의 이목을 집중 받으며 살수도 있는 행복이 있을 수있습니다. 그러면 그 세상은 한 사람을 위한 세상이 되어버립니다. Paradise의 세상은 그 한 사람을 위한 세상이 아닙니다. 주변이 어수선하고 정리가 되지 않는 지역에 화려한 집 하나가 있다고 좋은 집이 아닙니다. 주변의 환경이 좋아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내 집도 좋아야 하지만, 옆집도 좋아야 하고, 그 동네가 깨끗하고 안전해야 하며, 그래야 좋은 지역이라는 평가를 받게 됩니다. 나만 좋아서는 불가능하다는 말이지요. 교회 공동체가 그렇습니다. 어느 한 사람만 군계일학처럼 돋보여서 그 교회가 좋아지지 않습니다. 만일 그렇다면 그 사람은 그 교회에서 돋보이는 한사람이 될 수 있지만, 그 사람이 있다고 해서 좋은 교회라고 할 수가 없습니다. 모두가 같은 좋은 면을 드러내야 좋은 교회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하기 위하여 우리에게는 슈퍼맨(우먼)이나 군계일학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함꼐 이루어야 할 하나님의 꿈과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그것을 원하십니다. 모두가 군계일학을 꿈꿀 때, 하나님은 함꼐하는 공동체, 사실 교회라는 말 그 자체가 이미 공동체이지요. 모두가 함께, 같은 마음, 같은 생각, 같은 비전을 품고, 함께 수고하고, 함께 걸어가고, 함께 가야한다고 성경을 늘 우리에게 교훈하고 있습니다. 튀려고 하거나 혼자 가려고 하지도 말아야 합니다. 다른 한 지체가 무너지며녀 함꼐 무너지는 공동체의 법칠을 알아야합니다. 목사를 깍아내리고, 장로, 권사, 집사를 깍아내리면 자기가 돋보이는 줄 착각합니다. 그것은 함께 망하는 마귀의 지름길입니다. 군계일학을 꿈꾸지 말고, 모두가 좋은 크리스챤으로 함께 성장해야 천국을 이룹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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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름다운교회 Aug 14.2022 왜 하나님은 악을 제거하지 않으실까
    하박국 선지자는 하나님이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민족이 포로로 팔리고, 주변 강대국은 하나님의 백성들을 마치 물고기 낚시하듯 잡아채도 마냥 응답도 구원도 없으신 하나님이 원망스러웠습니다. 잔뜩 원망에 찬 질문을 쏟아놓고 하나님의 응답을 기다립니다. 그런 질문이 왜 하박국에게만 있겠습니까? 우리 주변에 보면 그러한 일이 비일비재합니다. 마치 하나님이 눈뜬 장님처럼 세상의 부조리와 악과 잔꾀가 많은 사람들의 사기행각들에 대해서 분노할 일들이 산더 미처럼 쌓여져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과연 왜 그러시는 것일까요? 에덴은 천국이었습니다. 악이 머물 수 없는 그곳에 하나님께서는 생명나무로 채우셨는데 이상하게도 그 동산의 한구석에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 (선악과)’를 두셨습니다. 아담과 하와는 생명나무로 얼마든지 행복한 삶을 살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사탄은 하와의 눈을 생명나무 보다는 선악과에 두게 만들어버렸습니다. 차라리 그 선악과를 하나님이 그 아름다운 동산에 두지 않았더라면 하와의 범죄로 이어지지 않았을텐데, 왜 하나님은 그것을 두어서 잔혹한 인간의 범죄로 잇게 하셨을까요? 이상합니다. 노아시대도 그렇습니다. 노아 방주로 피신시킨 동물은 정결한 짐승만이 아니라 부정한 짐승까지 태우셨습니다. 모든 것을 없앨때에 부정한 것들을 말살시켜서 정결한 것만 남겼더라면 이 후에 고민도 없이 인간은 정결법에 신경쓰지 않고도 살 수 있었을텐데,왜 하나님께서는 그것들을 함께 두셨을까요? 이해하기 쉽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순종을 요구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순종은 비단길이나 꽃길 이 아닙니다. 순종하기 위하여는 우리는 자발적으로 포기해야 하는 것이 있습니다. 포기하지 않고 선택하지 않고, 하나님의 거룩한 뜻에 순종하기란 불가능합니다. 만일 그것이 가능하다면 그것은 우리가 로봇처럼 살게 될 것을 의미합니다. 한 길만 주어졌다면, 우리가 선택할 기회가 없이 그냥 그 길만 갈 수만 있으면 그것은 순종이 아닙니다. 순종은 우리가 선택할 수 있을 때, 다른 것을 희생하고 하는 것일 때 가장 값진 것입니다. 세상에 수많은 배우자 감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많은 사람들 가운데 오직 한 사람, 그 배우자만을 선택했다는 것은 다른 사람을 포기했다는 것입니다. 그럴 때 그것이 가치가 있고, 고귀합니다. 만일 선택할 아무 것도 없는데 선택된 것이라면 그 선택은 바른 것이 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에덴 동산에서부터 우리로 하여금 자발적인 선택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를 원하셨습니다. 노아 방주속에 선과 악을 선택할 수 있는 갈등의 요소를 두고서 그 갈등속에서 선택하는 것이야말로 진정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을 배우게 하셨습니다. 세상의 부조리와 악이 성행합니다. 바로 이런 곳에서 하나님은 우리가 바른 선택을 하기를 원하셨습니다. 다른 것을 선택하지 않고 하나님을 선택했기에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잘했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라는 칭찬을 들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세상의 악은 우리로 침몰하도록 만드는 지뢰가 아니라, 진심으로 하나님께 순종할 수 있는 길임을 증명하는 훈련의 장소입니 다. 왜 악을 만드셨냐고 하나님을 원망하는 것이 아니라,그 선과 악을 선택할 수 있을 때에 기쁨으로 주님을 위해 선을 택하는 것을 주님은 기뻐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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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름다운교회 Aug 07.2022 죄는 진실을 타고 온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세상은 ‘보시기에 좋았더라’고 창조자 자신이 감탄하셨습 니다. 그리고 특정한 장소에 ‘에덴 유토피아’를 만드시고 흡족해 하셨습니다. 그 곳은 하나님과의 막힘없는 교제가 축복이었던 시간이었습니다. 인생의 모든 근심과 걱정이 존재하지 않는 ‘만족’의 상태와 장소였습니다. 그런데 인간은 그곳에서 죄를 짓습니다. 하나님께서 금하신 금단의 열매를 먹음으로 하나님의 명령을 저 버린 것입니다. 그 죄가 하나님과의 관계를 깨트렸습니다. 죄는 그래서 적극적으로는 그 분이 하지 말라고 하는 것을 범하는 것이며,소극적으로는 그분이 하라고 하는 것을 하지 않는 것입니다. 적극적인 죄는 곧바로 인식이 가능한데,문제는 소극적인 죄입니다. 그것이 죄가 아닌 양,그래서 우리는 죄인이 아닌 것처럼 포장하고 살았습니다. 사실은 그것이 죄인줄 모르고 지낸 것입니다. 태초의 시간에 인간은 죄를 범했는데,그 과정을 생각해 보면 머릿발이 쭈빗하게 설정도로 날카롭고 교묘합니다. 그 죄는 ‘뱀’이 이용되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지으신 짐승가운데 가장 ‘슬기로운(간교한)’ 존재였습니다. 자신의 지혜가 ‘덕’ 이 되지 못하고 악한 것에 쓰임받은 것입니다. 우리 자신이 장점이라고 여겼거나,기질이라고 가지고 있는 것들이 어이없게 쓰일 수 있다는 것을 눈여겨 보아야 하는 대목입니다. 하와 역시,평시에 궁금했던 것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냥 지나가면 되는데, ‘왜 하나님은 저것만 못먹게 하시지? 뭐가 있을까?’ 호기심이 상존했던 것 같습니다. 그 호기심이 자극을 받아 생각이 들어가니 얼른 그 열매 를 따 먹은 것입니다. 그리고 더욱 중요한 것은 사탄의 계략입니다. 진실을 거짓 으로 보이게 가져오면 곧 바로 알아차릴텐데,진실을 가지고 들어오면,정말 속아넘어가기 딱입니다. 들어보면 맞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사실이기도 합니다. 뱀이 여자에게 말합니다. ‘네가 먹으면 눈이 밝아져 네가 하나님같이 되기 때문 이야!’ 이 말은 거짓말이 아니었습니다. 사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다음을 말해 주지 않았습니다. 눈이 밝아진 것도 사실이었고,선악을 아는 일에 하나님과 같이 되었기 때문에 사탄은 거짓으로 승부한 것이 아니라,진실을 가지고 승부를 했습니다. 그런데 인간의 기대처럼 그 열매를 먹음으로 눈도 밝아졌고,하나님의 속성중의 하나를 갖게 된 것은 사실이지만,그 결과는 그것만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이 죄라는 것을 뼈저리게 인식하지 못하고, ‘반드시 죽는다’는 것을 ‘죽을까 하노라’고 희석된 하나님의 말씀으로 살았기 때문에 인간의 행복이 아닌, 비참한 존재로 떨어지게 되었습니다. 팬더믹의 시대를 지나고도 우리가 아직 배우지 못한 것이 있다면,우린 정말 어리석은 존재입니다. 팬더믹의 시대에 사탄은 ‘진실’을 가지고 우리에게 도전했 습니다. ‘모이면 바이러스에 감염돼! 위험하잖아? 그러니까 온라인 밖으로 나가면 절대 안돼,죽는다!’ 맞았습니다. 사실이었습니다. 그것을 우리는 그대로 받아들였 습니다. 그런데 나타난 결과는 무엇입니까? 하나님과의 관계를 망친 것입니다. ‘안전가옥’ 속으로 숨어는 지냈지만,하나님과의 관계는 한없이 쇠약해졌습니다. 우리의 허술한 ‘보안의식’이 영적인 무장해제로 이어진 것입니다. 사탄의 전략을 우리는 정신차리고 대응해야 합니다. 주는대로 냉큼 받으면 사고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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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29
    아름다운교회 Jul 31.2022 하나님의 안전장치
    우리가 살고 있는 이곳 베가스의 여름은 유명합니다. 처음에 겪은 이곳의 여름날씨는 마치 여름에 한국에서 온풍기를 틀어놓은 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정도로 뜨거운 사막 기후를 유감없이 발휘하던 기억이 있습니다. 1-2년은 정말 힘들었지만 이후에는 적응이 되어, 110도가 되어야 좀 덥네...하고 살게 되었습니다. 이런 라스베가스에 유별난 한 주를 보냈습니다. 하나님의 보너스라는 생각이 들정도로 시원한 한 주간을 보낸 것이지요. 그렇게 만족을 하면서 살았는데 카톡에서 여러분들이 문자를 갑자기 주셨습니다. 라스베가스에 비가 많이 와서 물난리가 났는데 괜찮느냐는 외부인들의 안부가 아니었다면 그런 소식도 모르고 지나갈 뻔했습니다. 그러고 보니 시내에서는 엄청난 비로 인해서 피해를 입었다고 하는 뉴그가 눈에 보였습니다. 참 희안한 일이 아닐수 없습니다.인생은 이렇게 수많은 일들이 기적(?)처럼 일어나게 되는 것을 목격합니다. 한마디로, 교만하게 살지 말아라, 하는 하나님의 음성과 같은 일들이 우리 주변에 시도 때도 없이 일어납니다. 사람은 '교만'과 벗을 하는 존재일 수 밖에 없습니다. 나도 모르게 조금만 됐다 싶으면 어김없이 교만해져서 우쭐해지는 것이 우리 자신임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 높아지려는 바벨탑쌓는 심정이 인간에게는 자연스럽게 다가서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가장 싫어하는 것이 바로 교만 입니다. 왜냐면 교만한 마음은 하나님을 보지 못하게 하거나, 자신을 속이는 촉매제가 되기 때문입니다. '자기충만'한 인생이 어찌 '하나님 충만'을 볼 수 있겠습니까? 교만 하지 않아도 하나님없이 살고자 하는 것이 인간인데, 교만이 들어가면 보이는 것이 없어집니다.고린도후서 12장에서, 사도 바울은 유명한 말씀을 전해줍니다. '내가 약할 때 곧 강함이라'는 말입니다. 사도는 경험한 은혜가 많다고 했습니다. 삼층천에 올라가고, 말로 다 할 수 없는 계시가 많았습니다. 아, 멀마나 자랑하고 싶었을까요? 내가 이런 은혜받았다. 내가 이런 사랑받았고, 이런 능력을 받았다! 동네방네 돌아다니며 자랑하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사도 바울의 마음에 교만하지 말라고 육체에 가시, 사탄의 사자인 자신의 질병을 주셨다고 했습니다. 이것마저도 해결해 주시도록 기도했는데, 하나님께서는 그걸로 족하다. 네가 약할 때에 내 능력이 강해진다고 하셨습니다. 그러고 보면, 사도바울의 풀리지 않는 숙제는 당신의 자녀를 교만하지 않게 하기 위한 하나님의 안정장치였던 것입니다. 우리는 이렇게 생각하면 됩니다. 내게 어려운 숙제가 생겼다. 문제가 터녔다. 고통스러운 일을 만났다. 아이고 난 이제 망했구나. 하나님은 왜 나를 이렇게 사랑하지 않는가? 원망하지 말아야 합니다. 오히려 감사해야 합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로 하여금 교만하지 말라고 하는 것과 하나님만 바라보라고 주시는 하나님의 안전장치이기 때문입니다. 이 안정장치가 없으면 금방 문제가 해결되고, 즉각 즉각 반응이 일어나는 것 같아서 행복하다고 하겠지만, 안정장치가 풀려있으면 언젠가는 사고가 나게 마련입니다. 마치 천사가 타락해서 사탄ㅇ이 된 것 처럼 말입니다. 교만은 그래서 망하는 지금길입니다. 하나님의 안전장치가 있다면 오히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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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28
    아름다운교회 Jul 24.2022 아까운 생각이 들때
    베가스에 살고 있는 우리는 간혹 빌보드에 누가 얼마를 땄다. 잭팟이 터졌다 등의 소식을 접하게 됩니다. 사실 그것은 카지노가 베가스 방문객이나 주민들에 게 그만한 혜택을 준다는 ‘호의’가 아니라, 와서 돈을 쓰고 가라는 상술과 유혹에 지나지 않습니다. 카지노에 머물수록 결국 카지노가 돈을 버는 것은 자명한 사실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돈을 따는 사람이 있으니 나도 돈을 딸 수 있다고 착각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모르지 않지만 제가 가정을 해 보겠습니다. 혹시 돈을 10만불을 땄습니다. 그럼 그 돈은 사실 공짜입니다. 내 수종의 돈이 아니었는데 내 돈이라고 주는 것입니다. 이 순간 우린 10만불이 내 돈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세금으로 30-40%를 떼고 주는 것에 대해서 무지하게 아까워합니다. 사실 1불도 내 돈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공짜로 10만불, 아니 세금 공제하고 6만불만 받게 되는 순간에 내것을 빼앗겼다는 손해의식이 생깁니다. 사실은 6만불도 공짜로 받았으니 기분좋게 받으면 됩니다. 그런데도 기분이 찜찜합니다. 이것이 사람 의 의식입니다. 일단 내 주머니에 들어오면 그순간부터 우리는 내 것이라고 생각 합니다. 그래서 나가는 것을 아까워하고 싫어합니다. 공짜였기에 얼마든지 나누 어도 될 것 같은데 일단 내 주머니에 들어왔으니 아까운 것입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살면서 그런 말을 합니다. 시편 50편에서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이라고 말하고, ‘금도 내 것이요, 은도 내 것 (학2:8)’이라고 할 때에 우리의 고백은 맞습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입니다라고 고백하게 됩니다. 욥의 고백 처럼 ‘주신 이도 하나님이시오, 거두시는 이도 하나님이십니다’고 우리 자신이 그 렇게 멋진 고백을 하게도 됩니다. 얼마나 멋있는 고백입니까? 맞습니다. 모든 것 이 하나님의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은혜로 받은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러한 고백이 말의 고백에 그칠 때가 참으로 많이 있습니다. 우리의 입술과 말 은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이라고 하는데 실제로 사는 것은 ‘내 것’이라고 주장하 고 삽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거저 주신 것이라고 하면, 주인이신 하나님께서 달라고 해도 사실은 아깝지 않아야 합니다. 그런데 왜 그리 아까운지요. 어느 미국 목사님의 설교가운데 우리의 찬송가에 ‘내게 있는 모든 것을 주를 위해 바치 네’라는 가사를 바꿔, ‘내게 있는 약간을 주를 위해 바치네’라고 바꾸어 부르는 것을 들으며 웃었는데 사실은 그게 우리의 진심인게지요. 말하고자 하는 핵심은 이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가진 것들이 주님께서 주신 것이고, 주님이 나에게 은 혜로 주셨다고 한다면, 우리는 이것들을 주님이 원하는 방향으로 사용하려고 해 야 합니다. 내 것으로 여기고, 나의 노력의 산물이라고 여기는 순간부터 우리는 주님께 드리거나, 흩어 나누는 일에 인색하게 됩니다. 인색하다는 것은 이것이 하나님의 것이 아니라, 내 것이라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어차피 짧은 인생을 살 아갑니다. 아끼고 인색한 모습이 아니라, ‘흩어 구제하여도 부유하게되는 일이 있 고, 과도히 아껴도 가난하게 되는 것이 있는 것’(잠11:24)을 인정하고 남을 위하 여 나누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우리의 모든 것의 되신 하나님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나누는 일에 열심을 내라고 하십니다. 왜냐면 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 이기 때문입니다. 나누는 것이 우리의 즐거움이 되기를 소원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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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27
    아름다운교회 Jul 17.2022 전도 한다는 것
    전도는 꼭 해야 하는 것일까요? 목회를 하다가 보면,우리 성도들의 헌신이 눈물겨울 때가 참 많이 있습니다. 내 삶의 필요한 부분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교회와 하나님 나라를 위하여는 기꺼이 내것을 내놓는 헌신을 하는 모습을 보기 때문입니다. 특별히 선교를 위한 요청에는 우리의 거룩한 부담감이 자원하는 물질로 이어지는 것은 이것이 바로 우리의 사명임을 잘 알기 때문입니다. 그만큼 생명 구원에 관하여는 ‘빚진 자의 심정’을 갖고 있는 것이 우리들입니다. 이것은 그만큼 교회가 구원의 방주역할, 영혼구원의 산실이어야 한다는 사명을 잘 이해 하고 있다는 반증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전도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모릅니다. 잘 알아들지도 못하는 사람 들에게, 또는 아무런 관심도 없는 사람들에게 외계인에게 오는 메시지처럼 공허 하에 들리는 ‘복음’이 무슨 소용이 있을 것인지 믿는 우리 조차도 의문을 품게 됩니다. 그래서 다투기 싫고, 논쟁하기 싫고, 부끄럼을 당할 것을 피하기 위해서 웬만 하면 전도를 꺼리는 것이 우리들이 아닌가 싶습니다. 만일 전도한다고 해도 겨우 ‘우리 교회 혹은 아무 교회나 나가보라’는 말 정도가 우리의 전도의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목사인 저 자신도 전도가 쉽지 않다는 것을 느낄 때가 많으니 우리 성도들은 어떨까 싶습니다. 그런데 이번에 수요 영성 훈련의 도서로 ‘이것이 복음이다 (simply good news)’ 라는 책을 읽으면서 도전을 받은 것이 있습니다. 외계인같은 우리의 복음의 내용 은 역사 속에서 진행되어왔는데 어떻게 이루어져 왔는가를 보라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고전1:23-24에서 십자가의 복음이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고, 헬라인에게는 어리석은 것이지만 ‘부르심은 받은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고 말씀합니다. 복음, 좋은 소식이 어떤 사람에게는 어리석은 것이고, 부끄러운 것이고, 거리끼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누구에겐가는 ‘하나님의 능력’이 되는 그게 누구이냐면 ‘부르심은 받은 자들’입니다. 이 부르심을 받은 자들은 이 복음이 생명의 말씀으로 들려집니다.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는 것도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입니다 (롬8장). 결국 부르심을 받는 사람만이 복음에 반응을 보입니다. 이 세상의 신 (그것이 물질이든, 숭배하는 것이든) 에 의해서 복음이 가리워 진 사람에게는 복음, 좋은 소식은 어리석고 수치스러운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택한 백성은 그냥 지나치지 않습니다. 복음의 말씀을 듣고 반 응을 합니다. 그 반응은 때론 강렬해서, 주님의 영을 경험하기도 하고, 육신의 질병을 뚫어내기도 하고, 삶의 고단함을 이겨내기도 하고, 반대와 핍박을 뚫고 복음에 반응하는 일들이 생기기도 합니다. 그만큼 복음의 능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교회가 오는 11월 15일을 한 생명을 주님앞으로 인도하려는 시도를 하려 고 합니다. 누구에게 전할까, 그 사람이 거절하면 어쩌나, ‘너나 믿어라’고 모멸감 을 받으면 어쩌나 그런 염려를 버리십시다. 우리의 전도는 사람들을 설득하는 노력이 아닙니다. 기독교나 우리 교회의 우월성을 근거로 교회한번 나오라는 ‘비지니스 전략’도 아닙니다. 우리의 전도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자를 찾는 작업’일 뿐입니다. 부지런히 찾아다니다 보면, 그 사람을 만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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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26
    아름다운교회 Jul 10.2022 목사님이 그러면 안되지요
    화가 치밀어 올랐습니다. 아니 무슨 일을 그따위로 하냐고 따지고 싶었습니다. 누군가와 전화 통화를 하면서 상대방의 몰상식하고 불편부당한 일에 대해서 서로가 같은 공분을 표현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제가 이랬습니다. ‘에이, 나도 욕이 나오려고 하네...’ 이랬더니 한창 열을 품던 그 친구가 전화기 속으로 이렇 게 말했습니다. ‘아니, 나는 그래도 목사님은 그러면 안되지요’ 자기는 평신도 이니까 그렇게 욕을 해도 되지만 목사님은 욕하면 안된다는 것입니다. 그 말에 생각이 멈추었습니다. 사람들은 욕해도 되는데 목사님은 욕하면 안된다? 왜? 목사 이니까 그런 것 아니겠습니까? 사람들은 목사에게 거는 기대치가 있습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목사님은 그래서 안된다는 기대치입니다. 나는 미워하고 살아도 당신은 사랑하며 사는 것이 아니냐, 그런 것 아니겠습니까? 나는 그렇게 살 수 없으나 적어도 목사인 당신만큼은 그렇게 살지 않아야 하고, 그런 기대치에 어긋 나면 사정없이 비난을 퍼붓습니다. 이것이 어찌 목사뿐이겠습니까? 사회에서 신망을 받는 지도자들도 마찬가지 입니다. 우리 대통령은, 우리 사장님은, 우리 장관님은... 나름대로 사회적 기대치가 있어서 그 기대치에 어긋나면 실망은 물론이거니와 심각할 때에는 사회적 매장은 각오를 해야 합니다. 대한민국의 청문회를 보면 더욱 그렇습니다. 누구하나 완벽한 사람이 없습니다. 모두가 ‘내로남불 인생’을 살았음이 온 천하에 알려지면서 낙마하기도 하고, 저열한 인간으로 낙인찍히기도 합니다. 그동안 그런 인간들을 손가락질하며 살았는데 막상 내 문제로 들어가 보면 나 역시 손가락질을 받는 인간일 수 밖에 없음이 자명해지는 순간입니다. 그렇습니다. 그것이 인간입니 다. 그것이 본래의 모습인 것이지요. 누구를 탓할 수 없습니다. 정도의 차이가 있 지만 누구나 그런 부류의 사람임을 우리는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다’(롬3;21)고 선언합니다. 어느 누구도 그 하나 님의 정의에서 빠져나갈 수 없습니다. 죄인의 길을 걸어가는 사람들이기 때문입 니다. 그렇다고 죄인이니까 그냥 자연스럽게 죄인답게 살자 그러겠습니까? 그럴 수 없습니다. 우리가 죄인임을 인정하는 곳에서 생명의 씨앗이 심겨지는 것입니다. 그곳에서 절망이 소망으로 바뀔 수 있는 지점입니다. 자신이 죄인임을 깨닫는 자 만이 예수님이 필요하다는 것을 인정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만나게 되면 우리의 근본이 바뀝니다. 지옥과 멸망의 자식에서 하나님의 자녀, 천국을 상 속받을 자녀로 살게 됩니다. 그러면 다 됩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안에 옛 성품들과 싸워야 하는 전쟁터가 상존합니다. 그 싸움을 싸우는 것이 영적 전쟁입 니다. 오늘 실패가 실패가 아닙니다. 오늘의 실수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새로운 하나님의 기대속에 우리는 오늘의 옛 성품을 이겨가야 합니다. 그 성품은 언제나 ‘나 (자아/이고)’ 중심으로 살려는 것입니다. 그것을 이겨야 합니다. 목사님 은 그러면 안되지요라는 기준이 이젠 ‘그리스도인은 그러면 안되지요’라는 기준과 함께 살게 됩니다. 장로님은, 권사님은, 집사님은 그러면 안되지요라는 말을 듣게 됩니다. 그것을 당연하게 들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기대감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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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25
    아름다운교회 Jul 03.2022 작품사진이 나오기까지...
    새벽기도회에 올 때 하나님이 주시는 선물의 하나는 아침 하늘에 떠오르는 태양이 만들어내는 빛의 향연입니다. 강렬하기도 하지만 부드럽고, 찐하지만 파스텔톤과 같은 아름다움은 세상의 그 뛰어난 미술가나 카메라도 완벽하게 담아낼 수 없습니다.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작품입니다. 그 작품을 눈에도 담고, 마음에도 담고 핸펀에도 담으며 오는 새벽 시간은 또다른 즐거움입니다. 가끔 인터넷에 올라오는 사진을 보면서 감탄을 자아낼 때가 있습니다. 정말 아름다운 사진입니다. 구도, 색상, 그 어느 하나 흠잡을 수 없는 작품으로의 사진 을 보면서 한편으로 드는 생각은 ‘나도 거기에 갔었는데? 그곳은 나도 알고 가본 장소인데? 아니, 그런데 왜 나는 그런 장면, 그런 아름다운 사진을 못찍었지?’ 아, 이런 곳에 이런 장면이 있었다니... 하면서 감탄을 하지만 왜 나는 그런 작품 과 같은 결과물을 못얻었는지 아쉬움을 느낄때가 있습니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많은 사람들 즉, 일반인들은 제한 된 범위로만 움직인다는 것입니다. 내 발이 닿는 곳까지만 가고, 내 눈이 보는 것까지만 보기에 누구나 같은 그림을 봅니다. 그런데 전문가는 다릅니다. 그들은 기다립니다. 시간을 기다리고, 환경을 기다립 니다. 빛이 만들어내는 미세한 감각까지를 느끼며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립니다. 뿐만 아닙니다. 그들은 움직입니다. 가장 아름다운 구도와 빛의 느낌을 보려고 부단히 움직입니다. 위로, 아래로, 때로는 발걸음이 멈추게 하는 이상의 곳을 넘어서 물에 빠지기도 하고, 높은 곳에 기어 오르기도 하고, 땅바닥에 바짝 엎드 리기도 합니다. 일반인은 할 수 있는 것까지만 하지만, 그들은 할 수 없는 것까 지 만들어냅니다. 바싹 다가가기도 하고, 너 멀리 떨어져도 봅니다. 그래서 나온 것이 작품입니다. 한 마디로 말하자면, 보는 각도를 다르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인생을 봅니다. 아픔도 있고, 시험도 있고, 고통의 시간을 지나도 갑니 다. 즐거운 시간은 문제될 것이 없습니다. 그냥 즐기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어둠의 시간을 그렇지 못합니다. 정말 아픕니다. 회의감이 생기고, 좌절감에 빠져 서 삶의 의욕도 없습니다.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럴 때 어떻게 하면 됩 니까? 그냥 누구나 볼 수 있는 장면을 만들어 내려면 그냥 남들같이 살면됩니다. 하지만 작품을 만들어 내려면 두 가지를 해야 합니다. 삶을 바라보는 관점 (angle)을 달리해 보는 것입니다. 삶이 고달파 아플 때에, 무엇인가 짓누르는 삶의 무게로 힘들 때에는 그것을 보는 관점을 바꾸어면 생각이 다르고, 생각이 바뀌면 삶이 바뀌게 됩니다. 그 각도를 달리하기 위해서는 고통을 감내해야 합니 다. 올라가고 내려가고, 부대끼고 아픔을 주는 요인을 감내해야 합니다. 그것은 훈련입니다. 훈련은 고통스러운 것이지만, 참 놀라운 유익을 우리게 줍니다. 오른 손 잡이인 제가 왼손으로 파리를 잡아보았습니다. 오른 손만큼 정확하지 않았습 니다. 이유는 덜 사용했기 때문입니다. 익숙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익숙해지도 록 단련을 해야 합니다. 익숙하기 전에 포기합니다. 인생이 아름다운 것은 고통 이 없기 때문이 아닙니다. 고통속에서도 만들어내는 열매가 있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환란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은, 연단은 소망을 만들어냅니다’ (롬5:3-4). 앵글을 바꾸어 보십시오. 그 앵글은 훈련/노력에서 얻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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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24
    아름다운교회 Jun 26.2022 옛 주일학교 선생님이 생각납니다
    올 해의 여름 성경학교는 특별한 방식으로 진행이 되었습니다. 그동안 교회에서 2박3일 정도 하루 2-3시간으로 편성된 일정으로 소화하다가, 이번에는 아예 하루를 잡아서 교회에서가 아닌 곳에서 camp형식으로 열리게 된 것이 특징입니다. 갑작스런 상황의 변화들로 인하여 당황스러운 가운데 여러 부담을 안고 시작한 캠프를 준비하고 진행하면서 많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담임 목회자로서 그 동안 주일학교 지도자나 부 교역자에 의해서 준비되고 진행 된 여름성경학교를 맞다가, 처음으로 직접 기획하고 준비하고 진행하면서 느낀 가장 귀한 한 가지는 ‘우리 아이들이 너무나 영특하고, 실력과 믿음이 뛰어나다’ 는 것입니다. 주일 학교 교육이 헛되지 않았다는 자신감과 희망을 본 것이 제게 는 정말 소중한 발견이었습니다. 이번 캠프는 영어권 선생님들에 의해서 준비된 것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과거 어느때보다도 준비와 운영에서 그리고 만족도 에서 전혀 뒤떨어지지 않았음을 확인했습니다. 정말 감사한 일입니다. 근래 우리 교회 주일학교는 선생님들이 영어권이 아니고, 나이든 분들이 선생님으로 투입되 었습니다. 하지만 운영되어지고 아이들의 집중력과 응집력을 보면 그 어느 때 보 다도 짜임새있게 운영되고 있음을 보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사실이 말하는 것이 무엇일까요? 우선, 정말 아이들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일까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평소에 이런 관념에 사로잡혀있습니다. 주일학교 선생님은 청년들이 하는 것이야. 특별히 이민 교회에서는 아이들이 영어에 익숙해져서, 한글을 모르는 아이들이 있기 때문에 꼭 영어를 쓰는 사람이 해야 하고, 나이든 사람보다는 청.대학부 학생들이 맡아야 한다는 고정관념(?)입니다. 어른도 아이들도 영어를 하는 교사 가 오면 만사가 오케이고 환영합니다. 그런데 나이가 들고 영어가 서툴면 이미 한풀 접고 무시합니다. 그러다가 보니, 영어가 편하지 않는 기성세대나 어른들은 아예 주일학교 교사를 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학부모들도 알게 모르게 그런 눈치를 줍니다). 영어를 좀 하는 선생님이 오면 ‘와~~!’ 환영일색이고, 영어를 잘 못하면 ‘에이, 얼마나 하겠느냐’는 생각이 표정으로 드러나 보입니다. 정말 그럴 까요? 아이들의 영혼을 다루는 문제가 나이와 언어에 관한 것일까요? 그것이 실력일까요? 이런 고정관념이 교회교육을 어렵게 하는 것은 아닐까요? 교육, 특별히 영적인 문제를 다루는 교육은 실력의 문제가 아니라 사명감과 영혼 사랑의 열정에 달려있기 때문입니다. 갑자기 제가 유년 주일학교 다닐 때에 주일학교 선생님들 대부분이 젊은 교사들이 아니라 아줌마, 아저씨들인 집사님, 권사님, 장로 님들이었습니다. 그 중에 이모 집사님이 계셨는데, 50대가 훨씬 넘긴 분이 어른 예배가 끝나고 나서 오후 2시에 열리는 주일학교 교사에 하루도 빠지지 않고 봉사하시던 분이십니다. 실력이 뛰어나서일까요? 아이들을 향한 영혼구원의 사랑 때문이었습니다. 이번 캠프를 준비하면서 갑자기 그 집사님의 얼굴이 떠올랐습니 다. 제 친구 어머니이셨습니다. 당시에는 잘 몰랐는데 목회하면 할수록 그 집사 님이 생각나는 이유는 주일학교 교육은 젊음이나, 언어능력으로 하는 것이 아니 라 아이들의 영혼을 사랑하는 마음과 사명감으로 하는 것을 더욱 더 느끼기 때 문입니다. 아이들의 반짝이는 눈 빛에서 희망을 보았습니다. 교회의 사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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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름다운교회 Jun 19.2022 우연일까? 하니님의 섭리일까?
    새벽예배를 위하여 달려오는 시간에 하나님께서 보너스를 주실 때가 있습니다. 그것은 이제 막 떠오르는 태양 빛이 만들어내는 환상적인 빛의 향연입니다. 얼마 나 곱고 아름다운지, 어떻게 그 색을 만들어내는지, 신의 영역에 속한 것이라 여겨질 정도입니다. 그런데 특별히 구름이 많고, 전날 바람이 휘몰아 치고나서의 하늘에 그려진 빛과 무늬의 환상적인 조화로움은 입을 다물지 못하게 합니다. 그럴 때마다 드는 생각은, 인생의 풍랑이 어렵고 고통스럽기는 하지만, 그것들이 있기에 인생이 묘미가 있고, 하나님의 손길을 보게 되는 기회가 된다는 것입니 다. 교회도 그러하고, 국가나 가정의 경제도 그러하고, 건강도 마찬가지입니다. 모든 인생에 고통은 없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그 고통속에서도 하나님께서 함께 하고 계심을 알고 계십니까? 때로는 침묵으로 일관하시는 하나님으로 인해 인생 의 마음이 상하기도 하지만, 심지어 그 기나긴 침묵속에서도 하나님은 홈런을 치실 때를 기다리고 계심을 보게 됩니다. 특별히 요즘 새벽 큐티가 에스더 성경 입니다. 이 성경을 읽으면 읽을수록 하나님의 오묘한 섭지가 마치 ‘우연의 일치’ 처럼 가장되어 다가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에스더 6장을 보면 그것이 더욱 두드러집니다. 왕이 그날 밤에 잠을 못자게 된 것이 우연일까요? 그 잠못이루는 밤에 역사기록을 더듬어 볼 생각이 난 것이 우연일까요? 그 많은 조각난 역사기 록물 중에서 하필이면 모르드개 사건 기록을 꺼내어 온 것이 의도된 목적이었을 까요? 모르드개의 사건을 들으면서 왜 하필이면 그가 상을 받았는지 안받았는지 가 궁금하도록 생각이 든 것이 우연이었을까요? 하필이면 하만이 그 자리에 있게 된 것도 우연의 일치였을까요? 우리 인생에도 이와 같은 역사가 반복됩니다. 그런 일이 있게 된 것이, 그렇게 상황이 돌아간 것이, 그것이 그렇게 돌아 돌아 여기까지 온 것이 우연의 일치일 까요? 사람들은 두 가지로 결론을 내립니다. 맞아, 그건 우연히 그렇게 된거야. 그렇지 않고서는 무슨 까닭이 있겠어? 또 다른 하나는 ‘아, 맞다. 그렇게 된 것은 우리가 알지 못한 가운데 우연을 가장해 다가온 하나님의 섭리 혹은 뜻이야’ 결국은 그 배후에 하나님이 계시는가, 아닌가를 인정하느냐 안하느냐에 따라서 갈라집니다. 믿는다고 하면서도 ‘우연’이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면, 과연 하나님 의 섭리를 믿고 있는 것일 수 없습니다. 당연히 하나님이 계셨기에 그런 일들이 일어날 수 밖에 없는 필연이라고 믿어지는 것이 자연스러운 신앙인의 자세일 것입니다. 하나님의 섭리와 뜻을 믿는 사람은 인생을 그냥 헛되게 보내지 않습니 다. 불평하거나 원망으로 인생을 낭비하지 않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원망과 불평 을 음식으로 삼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심지어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그렇 습니다. 하나님을 원망하고, 사람을 원망하고, 현실을 원망하고 불평합니다. 그것 은 예수를 믿는 사람도, 하나님의 주권을 믿는 사람도 아닙니다. 그냥 교회에 나오는 사람일 수 있습니다. 요셉을 보십시오. 하는 일마다 되는 것이 없습니다. 상황이 나아질 기미도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요셉은 단 1%의 원망도 하지 않습니다. 차라리 침묵합니다. 그 모습은 마치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과 같으신 우리 예수님을 떠오르게 합니다. 하나님을 믿었기에 가능한 일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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