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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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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름다운교회 Jul 25.2021 가난한 부자의 삶
    사람들은 ‘가난’을 싫어합니다. 증오하기도 합니다. 어느 누구도 가난을 좋아하지는 않습니다. 1945-1960년대, 일제 강점기의 수탈과 6.25전쟁의 폐허속에서 우리 부모님 세대는 ‘자식들에게 가난을 대물림 해줄 수 없다’는 신념으로 뼈를 깎는 고통을 감내하고 산업화를 이루어 경제적 부를 이루어낸 것이 대한민국입니다. 세계 최빈국의 하나인 대한민국이 세계 최부국의 하나의 대열에 참여한 것은 그야말로 기적중의 기적이었습니다. 그 즈음의 사람들에게는 ‘가난’은 정말 고통 그 자체였습니다. 가난을 싫어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사실, 우리의 일상 생활역시 가난이 주는 설움과 고통은 정말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더더욱 낯선 외국땅에서 내 나라 말로도 아닌 수많은 제약을 가지고 주류사회속으로 들어가지도 못하고 온갖 설움의 세월을 보내며, 당장 한달 먹을 것을 저울질해야 하는 삶을 사는 가난의 압박은 정말 해보지 않으면 힘들 것입니다. 세상에 누가 가난하게 살고싶은 사람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보다 나은 삶을 추구하는 것이 인지상정일 것입니다. 그러다가 보니, 가난을 벗어나고 싶은 것이 상식입니다. 나무랄 수 없는 일입니다. 하지만 가난을 벗어날 수 없는 살 수밖에 없는 경우가 허다하지요. 그럴 때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나요? 여기 한 예를 다윗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시16편에서 다윗은 자신의 역경속에서 하나님께 부르짖습니다. ‘여호와는 나의 산업과 나의 잔의 소득이시니 나의 분깃을 지키시나이다. 내게 줄로 재어 준 구역은 아름다운 곳에 있음이여 나의 기업이 실로 아름답도다(5-6절)’ 만일 다윗이 당하고 있는 지금 어려운 곳이 ‘하나님이 줄로 재어 준 구역’이라면 이곳이 아름답다 할 수 있습니까? 환경이 나쁘고, 역경과 고통의 삶을 사는 그곳이 우리의 눈에는 결코 아름다울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다윗은 그 ‘구역’ 하나님께서 허락한 그 상황(구역)이 아름답다고 감탄하고 있는 것을 봅니다. 다시 말해서 주어진 환경 때문에 아름다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나의 기업과 분깃’이기 때문이라고 고백하는 것을 보면, 바로 하나님 때문에 ‘가난하지만, 부유한 인생’이라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신약의 바울 사도에게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 것도 없는 것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고후6:10)는 이 놀라운 고백이 어떻게 가능한 것일까요? 세상은 소유의 정도에 의해서 평가하지만, 성경은 가진 것이 아닌, 하나님/예수그리스도와의 관계속에서 평가하고 있습니다. 사실 그런 것 같습니다. 아무 것도 없었던 신혼살림에서는 아내와 남편만 있어도 행복했습니다. 고기부페, 고급진 식당에 갈 형편이 아니어도, 된장국, 콩나물 한 그릇만 있어서 행복했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가진 것이 많아서가 아니었습니다. 사랑이 있었기 때문에 행복했던 시절이었습니다. 2차 세계대전에 독일이 유대인들에게 참 몹쓸 짓을 했습니다. 아우슈비치 수용소에서 수많은 사람이 굶주림등으로 죽어갔습니다. 그때, 그 죽음의 수용소에서 사람들은 자신의 굶주림속에서도 다른 사람들을 위하여 자기 음식을 내어주면서 죽어간 사람들의 이야기를 증언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사람다움일 것이며,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아갈 여유로움이겠지요. 가난하다 실망하거나 낙심하지 않고, 예수님 때문에 부요함을 선언하며 살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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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름다운교회 Jul 18.2021 참 아름다운 세상
    서울대 청소노동자가 과로로 사망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노동계에서는 서울대와 미화담당 팀장이 갑질을 해서 그 스트레스로 사망한 것으로  주장하며 공세를 펼칩니다. 이 경우에 양쪽의 이야기가 각각 다릅니다. 직원들의 증언도 각각 다릅니다. 갑질의 한 예를 들면 이런 것입니다.  팀장은 팀원들에게 정장을 입으라고 강요했다고 합니다. 청소를 하는 사람들이 작업복을 하는 것이 편하고 나은데 정장을 왜 하느냐, 이것이  갑질이 아니고 뭐냐는 것입니다. 그런데 막상 그 팀장은 회의 때에 이렇게 이야기했다고 합니다. “비록 미화 일을 하시지만, 작업복만 입지 마시고 일주일에 한 번은 자신을 위한 시간으로 멋지게 입고 오세요”라고  설명했다고 합니다. 아마도 미화원의 처지에서 자존감을 세워주기 위한 배려일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런 경우를 보면, 갑질이라는 입장에서   보면 갑질인 셈이고, 이해하는 입장에서 보면 배려일 수 있다고 생각됩니다. 그렇다면 어느 것을 보느냐에 따라서 그 결과는 너무나 다르게 나타날 수 있는 것이지요. 그 ‘보는것’은 어디에 달려있을까요?  그 사람의 마음의 상태입니다. 마치 물이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흐르듯이 내가 보고 싶어하고, 평소 신념처럼 가지고있는 것의 방향으로 흐르는 것이지요. 그래서 그 마음의 결정이 정말 중요합니다. 요즘 인터넷을 보십시오. facebook이든, youtube든, instagram이든 수많은 정보와 사연들이 알려지고 있습니다. 그 가운데 저는 정말 은혜롭고 아름다운 것들만 보려고 노력합니다. 비판적이고, 자극적이고, 세상적인 것들을 되도록 피하려고 애를 씁니다. 그래서인가요? 이 세상은 정말 아름다운 일들로 가득차 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정말 수없이 아름다운 사연들이 많습니다. 그것이 신앙적인 것이든 아니든 눈물없이 들을 수 없는 감동적인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내 자신의 삶과 신앙이 부끄러워질 정도로 말입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에게는 세상은 살만한 것일 수 있고, 어떤 사람은  세상은 살만한 곳이 못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 신앙인들은 어떻게 해야 할까요? 되도록 은혜로 마음을 채워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마음에 채워야 합니다. 0의 눈에는 0만 보인다고 말하지요. 우리는 그리스도의 사랑의 관점으로만 보면세상과 교회와 교우들이 그렇게 아름답고 사랑스러워질 수 없습니다. 어느 것을 보기를 원하느냐에 따라서그것이 보입니다. 남의 잘못만을 보는 사람은 그런 습관이 이미 몸에 배어짔는지도 모릅니다. 남의 장점을 보는 사람도 그런 습관이 되어있을 것입니다. 우리 심령에 무엇으로 물들어 있는지를 한번쯤 살펴보아야   합니다. 어떤 스님은 예수님을 믿고 목사가 되었습니다. 예수가 보였기 때문입니다. 우리 눈에도 그렇게 보이는 은혜가 있기를 소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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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75
    아름다운교회 Jul 11.2021 독재자를 위한 변명
    우스개 소리가 있습니다. 사람이 많이 모인 곳에서 이상한 광경이 목격되었습니다. 말 한 마리를 세워놓고 경품이 붙었습니다. 아무나 이 말을 움직이게 하는 사람에게는 거액의 상금을 주겠다고 했습니다. 사람마다 나서서 이 말을 움직여 보려고 온갖 수단을 사용했습니다. 달래도 보고, 맛있는 것으로 유혹도 해보고, 때려도 보고, 별짓을 해도 꿈쩍도 하지 않은 말을 보고있던 어느 목사님이 내가 해 보겠다고 나섰습니다. 그리고 이 목사님이 말에게 다가가 귀에다가 뭐라 뭐라 소곤거리며 말을 했습니다. 그랬더니 이 말이 갑자기 벌떡 일어나 움직이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목사님이 상품을 챙겼습니다. 사람들이 궁금해서 물었습니다. 도대체 뭐라고 했기에 말이 쏜살같이 일어나 움직이냐고... 그러자 목사님이 비결을 이야기했습니다. ‘말에게, 너 이민목회 할래, 아니면 움직일래?’ 그렇게   물었답니다. 물론 농담입니다. 말이 이민목회를 알겠습니까? 단지 이 우스개는 이민목회가 그만큼 어렵다는 것을 비유한 농담일 뿐이지요. 한국의 전통적 교회는 수십년간 교회를 섬겨온 일명 ‘토박이 성도’가 있습니다. 태어나서 한번도   교회를 떠나보지 않는 교인들이 굳건히 교회를 지키고 있기 때문에 어지간한  문제는 잘 이겨냅니다. 그런데 이민 교회는 그렇지 못합니다. 모두가 교회 다닌지 얼마되지 못하기 때문에 시끄러운 교회를 다니고 싶지 않습니다. 그래서 조그마한 문제가 생겨도 그냥 교회를 떠납니다.  우리 교회의 내규가운데, ‘부목사의 임면(任免/임명과 면직)은 전적으로 담임목사의 권한’임을 명시하고 있습니다. 문구 자체로만 보면 독재시대의 발상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담임목사가 전권을 잡고 칼자루를 들고 휘두른다는 인상을   주는 것이 사실입니다. 만일 담임목사가 신실하지 않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이라면 그럴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습니다. 교회를 염려하고 사랑하는 목회자라면 그럴 염려가 없고 그것을 교회가 신뢰하여야 하는 부분입니다. 그러하기에 이 규정은 담임목사의 독재를 인정하는 것으로 여기지 말아야합니다.   담임목사의 신앙인격과 영적 리더십을 인정하고 보면 이것은 ‘건강한 교회를   위한 것’입니다. 그 이유는 수많은 이민교회들이 이문제 때문에 아파하고, 교회가 무너지는 일이 수없이 많았기 때문입니다. 자기 이익만을 생각하는 부교역자들이 들어와 담임목사의 목회를 돕는 것보다는 자신들의 영향력을 키우고, 성도들에게 친분과 영향력을 바탕으로 자신의 이익을 실현하려는 것을 막기 위함입니다. 그런 부교역자들이 결국 자신의 이익분기점에 서면 여지없이 자신의 세워진 영향력을 바탕으로 교회를 어지럽히고, 교회의 영적 질서를 무너뜨리고, 심지어 교인들을 데리고 교회를 개척하게 됩니다. 그러면 고스란히 피해는 교회가 받습니다. 평안하던 교회가 갑자기 내편, 네편으로 갈리고, 마음이 나누어지고, 진실게임등으로 인해 결국 교회 불화의 원인이  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일에는 성도들의 신뢰와 동의가 있어야 합니다. 이 규정은 담임목사의 기득권을 지켜주기 위한 것이 아니라 교회를 보호하기 위한 고육지책입니다. 다행히 우리 교회에서는 그런 일이 없지만, 감정에 치우치다가 보면 어려움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목회자이든, 평신도이든 우리는 하나님앞에서 교회라는 공동체를 먼저 생각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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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74
    아름다운교회 Jul 04.2021 변죽만 울리는 인생
    지금도 기억이 생생합니다. 1992년 다미 선교회의 이장림이 주창한 시한부 종말론으로 인하여 한국의 기독교와 사회는 술렁임이 컸습니다. 그해 10월 28일 자정에 휴거라 일어난다고 하여 그 추종자들이 서울의 어느 장소에 흰옷입고 예수님을 맞이한다고 하여 언론, 방송사들의 중계와 만일의 사태에 대비한 경찰의 배치등으로 어수선한 분위기가 헛발로 그쳤던 적이 있었습니다. 그 모임에 참석하지 않았던 사람들과 그것이 이단적 주장이라고 말했던 기성교회 교인들도 ‘혹시 진짜 예수님 오시면 어쩌나...’ 걱정도 됐을 것입니다. 하지만 세기의 이 사기극이 끝났을 때, 거기에 몸담고 온 재산 팔아서 헌물하고 휴거를 기다렸던 사람들뿐만 아니라, 이를 바라보았던 믿지 않은 사회에 ‘부활신앙’ ‘재림신앙’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을 심어주게 되고, 이 폐해는 고스란히 한국 교회에 안겨졌습니다. 이 후로 기독교 신앙의 핵심이 부활과 재림신앙이 큰 타격을 입었고 강단에서 부활과 재림에 대해 설교하는 것이 부담스러울 정도가 되었습니다. 엄청난 폐혜가 이단 종교인에 의해 일어났던 것입니다. 세상이 과연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바르게 알지 못하고, 영적으로 깨어있지 않으면 정말 부지불식간에 망하는 경우가 생깁니다. 그래서 ‘꺼진 불도 다시보듯’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것들에 주의를 기울이는 것은 신자의 본분일 것입니다. 하지만 문제는 말도 안되는 주장들을 유튜브에 올려놓고 온갖 감언이설로 자신들의 주장을 ‘믿도록’ 그럴듯하게 포장하여 전달하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자기의 마음에 파고드는 생각이나 주창들을 가감없이 받아들여, 마치 1992년의 휴거를 믿었던 사람들처럼 그렇게 될 확률이 너무나 많습니다. 마치 이런 것과 같지 않을까 싶습니다. 독감이 매년 유행합니다. 그리고 그 독감 때문에 많은 생명이 사라져갑니다. 그런데 독감 주사를 맞아도 위험에 빠질 수 있습니다. 그 백신 때문에 설사 몇 사람들이 피해를 받았다고 해도, 그것은 일부에 지나지 않습니다. 여전히 백신을 맞아서 위험을 피한 분들이 대부분입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그 백신 맞으면 안된다고 강력하게 주장합니다. 무슨 의사, 박사들이라고 말하면 사람들은 더 신뢰를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작은 ‘사고’나 ‘우연’을 마치 진리인 것처럼 말하는 사람들이 있고, 그것을 또한 신봉하며 따라가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main stream속에서 생각하고 받아들여야 하는데 사람들은 곁가지, 예외적인 것, 가능성이 적은 것들에 집중을 하고 그것에 온 마음을 기울이는 것은 문제가 있습니다. 예측할 수 없는 사고나 위험을 대비하는 것은 나무랄 것이 없습니다만, 그곳에 너무 치심한 나머지 본류에서 벗어나는 생각과 삶을 산다면 무엇인가 중요한 것을 놓칠 수 있습니다. 중요한 본류안에서 살면서 만일에 있을지 모를 위험에 대처를 하는 것이 옳은 방향이지, 본류가 아닌 지류의 말을 듣고 따라가면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우를 범할 수 있습니다. 이것을 소위 ‘변죽만 울린다’라는 것으로 설명하면 어떨지 모르겠습니다. 교회가 나아가야 할 중요한 방향성을 정하고 나가야 하는데, 사소한 위험을 방지한다는 명분으로 마땅히 나가야 할 것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불평, 불만만으로 교회가 새로운 길로 갈 수 없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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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73
    아름다운교회 Jun 27.2021 델타 바이러스
    미국의 바이든 대통력이 오는 7월4일 독립기념일에 ‘바이러스 독립선언’을 하려는 계획이 어렵게 되면서 주변의 염려들이 고개를 들고 있습니다. 그것을 부추키는 하나는 Covid 19의 변이 바이러스인 ‘델타 바이러스 혹은 델타 플러스 바이러스’의 위협이 만만치 않고 있기 때문입니다. 마스크를 제일 먼저 공식적으로 벗었던 이스라엘이 다시 마스크를 착용하고, 문을 열었던 영국이 다시 봉쇄에 들어가는 등, 점차 또 다시 팬데믹의 재발로 가는 것이 아니냐는 우려가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이제 겨우 움츠러들었던 어깨를 펼만하니 다시 또다른 문제로 우리의 마음을 얽매어 놓으려는 불안한 시도가 있다고 생각하니 가슴이 답답해집니다. 이러한 시기에 우리 성도들은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무엇을 준비해야 할까요? 정말 진지하게 고민을 해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인류의 역사를 보면, 대 역병들이 번져서 인류를 위협했던 적들이 많았습니다. 현대사 속에서도 그렇습니다. 21세기에 들어와서도, 2003년에 SARS, 2009년에 Swine Flu, 2014년에 Ebola, 2016년에 Zika, 2019년에 Covid 19등이 몇 년을 간격으로 인류의 생명을 위협해 온 것은 이미 주지의 사실입니다. 이제 이 코비드가 좀 갈까 싶었는데 또 다른 변이 바이러스가 덮쳐서 우리의 간담을 서늘하게 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대처하면 됩니까? 이렇게 지축을 흔들 전염병들이 생길 때마다 두려워 숨고, 떨고, 마음의 빗장, 삶의 빗장을 걸어잠그고, 이 목숨을 유지하려는 것에 우리의 모든 에너지를 쏟아야 할까요? 그렇지 않아야 합니다. 죽음의 문제를 극복하는 것은 죽음의 방식을 피해다니는 것이 아니라, 죽음의 문제에서 자유로울 수 있을 때 이길 수 있습니다. 이 다가오는 채널은 바이러스 뿐만이 아닙니다. 교통사고, 각종 질병, 스트레스등 여길 피하면 저 문제로 걸려들어 고통을 벗어날 수 없게 되어있는 것이 인간의 삶의 구조적 운명입니다. 설혹 그렇게 잘 피해서 수십년을 산다고 해도, 결국은 ‘인간은 죽습니다’ 그것이 인간의 한계요 운명입니다. 그렇다고 한다면, 우리는 죽음을 피할 방법을 찾는 것보다는 죽음을 대면하며 사는가를 확실하게 알아야 두려움에서 해방될 수 있습니다. 카르타고의 주교 키프리안이 주후 251년경 대 역병이 퍼져가고 있을 때에 쓴 글이 인터넷에 회자되었습니다. “공포스럽고 치명적인 이 역병과 흑사병이 각 사람의 공의를 검증하고 인류정신을 되돌아보는 계기가 되니 얼마나 시의적절하고 얼마나 필요한 일인지 모릅니다. 건강한 자는 병든 자를 돌보는지, 친족끼리 서로 사랑할 도리를 다하는지, 주인이 병든 노예에게 자비를 베푸는지... 드러나게 됩니다. 이 대 사망이 별다르게 공헌한 바가 없더라도, 특별히 기독교인과 하나님의 종들에게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훈련을 하며 기꺼이 순교를 갈구하게 만드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우리에게는 이것이 죽음이 아니라 힘겨운 훈련이니다. 기독교인에게는 이 훈련이 죽음을 멸시함으로써 면류관을 예비하고 앞으로 전진하는 영광이 됩니다. 주님의 부르심을 받고 세상에서 먼저 놓임을 받은 우리의 형제들은 애곡의 대상이 아닙니다. 그들은 잃어버린게 아니라 먼저 부름을 받은 사람입니다... 그들은 애곡의 대상이 아니라 그리움의 대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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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72
    아름다운교회 Jun 20.2021 아직 가슴에 불이 남아있는지...
    1997년 7월, 미국에서 유학을 마치고 하와이를 거쳐서 한국으로 귀국을 하게 되었습니다. 유학 4년동안을 정말 하나님이 간섭하셨고, 그 기간동안 한 해도 거르지 않고 학비를 보내준 성도들을 비롯하여 가족들과 주변 사람들의 헌신적인 돌봄으로 마치고 돌아가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사역할 임지가 정해지지 않은 것입니다. 돌아갈 날은 다가오고, 갈 곳은 마땅치 않았습니다. 그때 기도하면서 하나님께서 주신 마음 하나가 큰 빛처럼 떠올랐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목사로 부르시고, 유학까지 마칠 수 있게 하신 것은 좋은 직장(?)에 취업하라고 부른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라고 부르신 것’이라는 소명을 깨닫게 한 것입니다. 그때 결심이 섰습니다. 그래, 돌아가자, 오라는 곳이 없으면 서울역 광장에 나가서 예수를 전하면 되지 않은가? 복음 전하라고 부르셨으니 어디든 전하면 되지 않겠는가? 그런 마음이었습니다. 가슴에 뜨거운 불이 솟아올랐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길로 인도하시지 않고, 전혀 엉뚱한 길로 인도하셨고, 그러한 방식으로 지금까지 저를 인도해 오셨음을 고백하지 앟을 수 없습니다. 어느 교단의 통계에 의하면 코로나 팬데믹으로 인해 교인의 수는 줄었음에도 불구하고 목사, 장로의 수는 예년 수준으로 늘어났다고 합니다. 아마도 거의 모든 교단의 공통 현상이라고 해도 틀리지 않을 것입니다. 사람들은 줄어가는데 목회자는 늘어갈 수 밖에 없는 구조이기는 하지만 이 시대에 참 목자를 어떻게 기대해야 하는지에 대해 심각한 고민일 필요할 것 같습니다. 코로나 시대 이후에 더욱 더 관심을 가져야 할 부분이 바로 ‘영혼구원’입니다. 교회와 목회자 그리고 성도들의 목표는 ‘교회성장’이 아닙니다. 교회의 성장은 영혼구원의 열정에서 나오는 자연적인 결과일 뿐입니다. 오늘도 수많은 영혼들이 ‘구원’이 필요한지도 모르고 각자의 길을 가고 있습니다. 이들을 위해 외칠 복음과 관심이 어느 때 보다도 필요할 때입니다. 왜냐면 이 시대가 가는 길이 무엇인가 편안한 마음일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 시대에는 오히려 방치된 영혼들이 많습니다. 포스트모더니즘의 영향이며, 그것은 그 열매가 지독한 개인주의 때문입니다. 개인적 견해와 주관이라면 누구도 손대지 못하게 합니다. 그리고 그것이 옳다고 이 시대는 주장합니다. 그러다가 보니, 자연스레 영혼에 관심도 줄어들 수밖에 없습니다. 불(fire)은 불(fire)일 수 밖에 없는 성질이 있습니다. 아무리 작은 불도 큰 불을 만들어 냅니다. 불이 꺼져있기에 불을 붙일 수가 없습니다. 아무리 작은 불도 살아만 있다면 역사가 일어납니다. 오늘 우리 시대에 필요한 것은 바로 그 작은 ‘불씨’입니다. 우리 심령에 불이 살아있는지 살펴보아야 합니다. 이 불이 있을 때에 일을 내게 됩니다. 문제는 우리 안에 불을 붙일 수 있는 불이 없다는 것입니다. 목장에, 전도회에, 교육부에 성령의 불이 살아있는 한 두 사람만 있어도 불씨는 살아나게 됩니다. 어떻게 하든 우리 심령안에 불을 붙여야 살 수 있습니다. 불이 꺼진 심령은 쉽게 원망과 불평에 빠집니다. 그리고 열심과 사모함도 살아집니다. 그리고 비판할 것만 남습니다. 불씨가 살아있는 심령은 주를 사모함이 많습니다. 감격과 감사가 넘쳐납니다. 열심과 배려 그리고 섬세한 사랑과 헌신이 있습니다. 교회에 불씨가 살아나게 되기를 소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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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름다운교회 Jun 13.2021 아직도 소망이 있사오니...
    어렸을 적에 송대관이라는 가수가 이런 노래를 불러서 유행을 한 적이 있습니다. “쨍하고 볕들날 돌아온단다~~” 이후의 가사는 기억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이 노래가 한때 사회의 빅 히트곡이 되어서 지금까지 뇌리에 남아있습니다. 지구촌 모든 사회에는 이렇게 ‘희망’을 노래하는 가사들이 많이 있습니다. 아무리 어려운 시기에도 소망/희망은 우리의 삶에 마중물과 같은 역할을 하면서 침체되고 어려운 시기속에서도 한 줄기 빛을 제공해 줍니다. 희망의 모든 인류의 공통분모입니다. 하지만 그 희망이 보이지 않을 때 인간은 서둘러 죽게 됩니다. 어떻게 생각하면 희망/소망은 우리 삶의 필수 아미노산과 같은 역할을 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성경에서 예레미야의 삶을 보면 정말 가슴이 아픕니다. 누군들 자기 민족과 가족 그리고 부모 형제들이 전쟁포로가 되어 비참한 삶을 사는 것을 바라겠습니까? 그러나 예레미야는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 자신의 희망과 바램을 뒤로하고, 비참한 미래를 자기 민족에게 선포해야했습니다. 국가로부터 배신의 딱지를 받습니다. 친지와 동료들로부터 왕따를 당할 뿐만 아니라 말할 수 없는 고난을 몸으로 받아내야 했습니다. 나라는 망해갑니다. 회개해야할 백성은 강퍅해서 목을 곧게 합니다. 사공은 많아 어디로 갈 줄 모릅니다. 하나님을 향한 기도에는 응답조차 없습니다. 생각만해도 많은 낙심과 절망이 양식이 됩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예레미야는 이 와중에서 이런 고백을 합니다. “중심에 회상한즉 오히려 소망이 있사옴은....”(애3:21). 모든 것이 막혔다고 생각하던 그에게 한 가지 섬광같이 보이는 것이 있었습니다. 세상이 마지막으로 달려가는 것 같아서 절망이고 죽음이고 그게 끝이라고 생각했는데 가만히 깊이 묵상해 보니 오히려 소망이 있었다고 고백합니다. 코로나 시대를 맞아 많은 상황이 절망적 분위기로 바뀌었습니다. 미래가 보이지 않고, 심지어 이제는 교회 시대는 끝났다고 탄식하는 일도 지겹도록 듣습니다. 앞뒤를 둘러보아도 그래보입니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습니다. 교회가 망할 것 같은데 생각해 보면 소망이 있었습니다. 사람들이 다 떠나서 교회가 힘을 발휘하지 못할 것 같은데 망하면 망할수록, 어려우면 어려울수록 커지는 것이 하나가 있습니다. 나는 망해도 망할 수 없는 것이 하나가 있습니다. 예레미야는 그것을 발견한 것입니다. ‘여호와의 자비와 긍휼이 무궁하시므로’(애3:22). 바로 그것입니다. 약해질 수 있습니다. 어려워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망해도 완전히 망하지 않는 이유는 우리가 주님께로 돌아올 백성이 마지막 그루터기 같이 남아만 있어도, 그 그루터기가 회개할 때에 새싹이 나고 자라는 생명이 자라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인생도 그렇습니다. 약할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의 약함으로 인해 탄식하며 주님께 돌아가는 회개를 통해서 하나님의 은총을 입을 때에 약함은 더 이상 약함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하심은, 우리의 약함을 통해 주님께 진정으로 돌아가려는 심령에 부어져서 마침내 다시 태어나는 은혜를 누리게 될 것입니다. 세상이 망하는 것 같아도, 교회가 힘을 잃어가는 것 같아도 낙심하지 마십시오. 어려움이 가정에 산적해 있어도 낙심하지 마십시오. 내 힘이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의 긍휼하심과 자비 때문입니다. 그분만 붙잡으면 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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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름다운교회 Jun 06.2021 변화와 변질
    목사님들끼리 만나면 이구동성으로 우리가 사는 세상이 너무나 달라졌다고 합니다. 변화의 물결이 갑자기 이루어지다보니 사회 곳곳에서 그 변화에 적응하려는 몸부림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너무나 급진적인 사회의 변화속에 갑자기 한방 먹은 것과 같은 어려움이 교회들을 휩쓸고 지나갔고, 이 변화의 물결에 적응하려는 몸짓 또한 눈물겨울 정도입니다. 자원과 기술이 집약된 사회는 그 변화속에서도 제대로 대응을 해내기도 하지만 교회는 대다수가 개척교회의 수준에 머물러 있어서 그 변화를 감당하지 못하고 쓰러지기도 하는 것을 쉽게 볼 수 있습니다. 종교사회학자들이나 언론들에서는 이 변화의 물결속에서 상당한 교회들이 이미 문을 닫았다고 지적했습니다. 미국에서만, 일년에 3500개 교회가 개척을 해마다 한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중 1/3이 살아남고 나머지는 사라진다고 합니다. 그런데 팬테믹 기간동안에는 오히려 개척한 숫자보다는 문을 닫은 숫자가 훨씬 많다고 지적했습니다. 한국도 마찬가지입니다. 특별히 젊은 층이 얇아졌음을 강하게 어필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따지고 보면 그 내리막선은 이미 오래전부터 보여온 현상입니다. 다만 이번 팬데믹으로 인해서 급강하된 것일 뿐입니다. 참으로 가슴쓰리는 분석이 아닐 수 없습니다. 목회자들만 아니라 관심있는 교회 지도자들에게는 염려가 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 보면, 이러한 위기는 어쩌면 훨씬 더 강하고 심각하게 이루어져야 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동안 교회는 ‘성장’이 공식화된 도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습니다. 급작스러운 기독교 인구가 폭발적으로 늘어나는 것만을 보고, 그것이 교회 성장이라는 달콤함을 던져주었고, 사람들은 그러한 성장 속에서 무엇인가 변질되는 자각하지 못하는 자가면역 상실증에 걸린 교회가 되었다는 것을 생각할 때, 이러한 퇴보나 깨트려지는 것은 오히려 건강한 신앙과 교회를 이루는데 큰 자양분을 형성할 수 있겠다는 마음이 드는 것은 왜일까요? 시편4:7에는 ‘주께서 내 마음에 두신 기쁨은 그들의 곡식과 새 포도주가 풍성할 때보다 더하니이다’라고 노래합니다. 어느 날 갑자기 이런 부끄러움이 일어났습니다. 요즘 ‘성도’들은 ‘하나님이 우리 마음속에 두신 기쁨’보다는 ‘곡식과 새 포도주가 넘칠 때의 기쁨’에 비하면 너무나 초라한 것이 아닐까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수확이 많아지고, 곡식 쌓을 곳이 없도록 풍성하게 부어지는 축복이, 내가 주님 때문에 갖게 되는 기쁨보다 훨씬 크다는 것입니다. 다윗은 이 시편에서 ‘그들의 ....기쁨’이라고 부릅니다. 나의 기쁨과는 다릅니다. 그들의 기쁨입니다. 그들은 곡식이 많고, 새 포도주가 넘쳐야 기뻐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기쁨은 그런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만일 이렇게 되면 그것은 ‘변질’입니다. 변화되는 세상에 살다가 보니, 살아남기 위하며 몸부림치는 과정속에서 진짜 가져야 할 ‘주님의 기쁨’은 온데 간 데 없고, 세상에서 얻는 기쁨이 최고의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다는 것인데 이것이 바로 심각한 변질이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신앙은 뒷전에 밀려납니다. 왜냐면 세상이 주는 그 기쁨은 정말 짜릿하기 때문입니다. 이제 회복되어야 할 때입니다. 주님의 주신 기쁨으로 돌아가야 할 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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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69
    아름다운교회 May 30.2021 마스크를 벗을 수 있을까?
    미국은 코로나 백신의 접종율이 50%를 넘어서면서 정부에서는 백신접종 완료자들은 실내에서 마스크를 벗도록 하였습니다. 각 호텔들에서도 오는 6월부터 마스크를 쓰지 않겠다고 발표하기도 했습니다. 코로나가 시작되었을 때, 유독 미국인들은 마스크를 쓰는 것에 대한 거부감이 많았습니다. 대통령을 비롯한 보수적인 색채를 가진 미국인들은 마스크를 쓰는 것이 무슨 수치인양 거부감이 심했던 것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마스크가 바이러스 방역에 효과가 있다는 것이 증명되고 그것이 대세가 되었습니다. 마스크를 쓰라고 쓰라고 강제를 해도 잘 착용하지 않던 미국인들이 마스크를 벗으라고 하면 제일 먼저 반기고 벗어던질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참 이상한 현상은 마스크를 벗으라고 했더니 이번에는 마스크를 안 벗으려고 한다는 경향이 있다는 것입니다. 참 기이한 일입니다. 이유인 즉은 그동안 마스크를 써봤는데 나름대로 유익이 있더라는 것입니다. 이 마스크가 단지 방역을 위한 수단이기도 했지만, 나를 다른 사람들에게 드러내지 않아도 되는 방어기재 역할을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얼굴을 그대로 드러내면, 내 표정에서 각종 감정이 드러나야 하는데 그것이 싫다는 것입니다. 싫은 사람앞에서 싫다는 표정을 지을 수 없는데 마스크로 가리지 모든 감정이 가려져서 애쓰게 내 감정을 감추려고 노력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입니다. 사람에게 마스크를 씌워놓았더니 처음에는 불편했지만 감정 노출의 연기를 하지 않아도 되는 편리함을 사람들이 배운 것입니다. 교회는 어떨까요? 사실 이젠 거의 모든 교우들이 백신접종을 했기 때문에 마스크를 벗어도 됩니다. 그런데 사람마다 마스크를 벗는 것을 주저하고 있는 이유도 같은 이유일까요? 억지로 좋아하고 웃는 표정을 낼 필요가 없어서 너무나 편리하다는 사람들의 논리처럼, 마스크 쓰고 있으면 말씀에 공감하는지, 싫다고 표현하는 것인지, 내 감정을 안드러내도 되고, 찬양을 할 때나, 통성 기도를 할 때에라도 입이 보이지 않으면 찬양을 하고 있는지 안하는지 노출 될 필요도 없습니다. 그냥 입을 가리고 있으면 다른 이들에게 나를 노출시킬 기회가 없으니 남의 시선에서 자유롭게 되기에 마스크를 벗으려 하지 않는 것은 아닐까요? 물론 한층 강화된 방역을 위해서 그리 하는 것은 나무랄 일이 아니지만, 보이지 않음 속에서 숨고 싶은 우리의 심리적 안정을 위해서 여전히 마스크를 착용하고 있다면 그 문제를 짚고 넘어가야 할 것입니다. 라틴어에서 인간이라는 단어, person 이는 말은 ‘가면’을 뜻하는 말에서 기인했다고 합니다. 인간은 가면쓴 존재임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인간은 본질적으로 가면을 써야 되는 존재이라는 말이겠지요. 사람들이 모이는 공동체속에서 각자가 포장된 가면을 쓰고 사는 것이 불편해서 또 다른 마스크 가면을 써야 한다고 하면 이중가면을 쓰고 있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우리는 예배하는 공동체입니다. 영이신 하나님앞에 숨길 수 없는, 발가벗은 것 같이 드러날 존재들입니다. 우리의 마음의 가면도 통하지 않고, 얼굴의 마스크 가면도 통할리 없습니다. 마스크라는 가면속에서 우리의 편리함들, 화장 안해도 되고, 남에게 나를 드러내 보이지 않아도 되고, 내 표정을 드러내지 않아도 되는 편리함이라면 마스크 벗는 것을 고려해 보지 않나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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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68
    아름다운교회 May 23.2021 냉장고에 넣어둔 신앙
    지난 팬데믹으로 인하여 성도들 만나기도 어렵고, 만나는 장소도 안전하지 못하여 택한 심방의 방법으로 교회에서 음식을 해서 성도들을 심방하는 것이었습니다. 다행히 음식하는 것에 약간의 소질(?)이 있어서 괜찮은 반응을 보이며 성공적인 정착방법이 되었습니다. 음식을 만들다가 보니, 냉장고에 남은 음식재료등을 보관해야 하는 경우들이 생겼습니다. 요즘 음식하는 횟수가 줄어들다가 보니 냉장고에 보관하는 기간이 길어지기도 합니다. 처음에는 그저 음식을 냉장고에 저장하는 것이 능사인줄 알았습니다. 냉장고가 음식을 아주 효과적으로 잘 보호해주리라고 믿었습니다. 그런데 그 냉장고가 나의 믿음을 배반했다는 것을 느끼는데 걸리는 시간은 오래 걸리지 않았습니다. 다시 쓰려고 보니, 상한 것, 변질된 것, 신선도가 떨어지는 것을 보게 된 것입니다. 음식을 다루는 주부도 아닌 제가 그것을 어찌 알았겠습니까? 냉장고가 만능인 줄 알았습니다. 언제까지나 신선도를 지켜줄 줄 알았는데 상하는 것의 시간만 늘어났을 뿐, 반드시 마르고, 상하고, 변질, 변색되는 것을 막을 수가 없었습니다. 냉장고가 만능이 아니었던 것이지요.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팬데믹을 지나면서 많은 사람들이 자신들의 신앙을 과신하지 않았나 싶습니다. 어디가도, 어떤 상황이 와도 내 신앙은 변질되지 않을거야, 교회에 와서 예배를 드리지 않아도, 영상으로 예배를 드려도, 놀러가서 인터넷으로 예배를 드리면 되지 하는 사람들로 가득찼습니다. 마치 일정기간동안 냉장고에 보관하는 음식처럼, 자신들의 신앙도 냉장고에 보관했으니 괜찮을 것이라는 판단이 섰을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이제 팬데믹이 끝나가고, 일상으로 돌아가는 시점에 와서도 빗장을 풀지 않고 지난 1년 넘는 시간동안 쌓여진 습성대로 그저 ‘편안한 예배’에 도취되어 냉장고에 저장한 음식처럼 꺼낼 생각을 하지 않고 사는 사람들이 여기저기에 널려있다는 것을 보는 것은 어렵지 않은 것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목회자로서 보는 시각은 다릅니다. 이미 그 냉장고에서 음식이 썩어서 냄새가 나기도 하고, 이미 신선도를 잃어버렸는데도 불구하고, 냉장고에 넣어 두었으니 안상하겠지... 안심하고 있다는 것을 느낍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부르신 것은 우리를 예배자로 살게 하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여 무엇이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뜻인지를 찾아서 그 길을 순종함으로 걸어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난 예배 드렸으니 다 했어!’라고 말하는 듯, 자기중심에서 벗어나지 않으려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음식을 먹고 거기서 얻은 에너지를 가지고 여기저기에 사용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니 저장하기만 하여 온갖 성인병으로 고생하는 것을 압니다. 들어가는 에너지와 나오는 에너지가 균형이 맞아야 하는데 불균형인 셈입니다. 신앙생활이 바로 그렇습니다. 내가 받은 은혜를 가지고 하나님의 자녀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를 분별해야 합니다. 이 시대를 본받지 말고 하나님이 말씀하신 그 뜻이 무언지를 찾으며 살아가야 합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신앙생활을 냉장고에 넣고서 언제나 썩지 않을 것처럼 쓰지 않고 있습니다. 아닙니다. 지금도 하나님의 사람들은 그것을 위하여 쉼 없이 달려갑니다. 냉장고에서 꺼내십시오. 언제나 썩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유효기간이 다하기 전에 냉장에서 꺼내서 사용하십시오. 주님의 영광을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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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67
    아름다운교회 May 16.2021 포기하지 않는 사랑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세상의 최초 기관은 가정이었습니다. 과거 어느 때보다도 핵가족의 시대를 맞아 가정의 의미와 중요성이 훨씬 강조되는 시대를 우리가 살고 있습니다. 가정이 행복해야 합니다. 가정만큼 중요한 것도 교회입니다. 왜냐면 교회는 영적인 가정이기 때문입니다. 요즘 가정 세미나를 진행하면서 참 많은 생각과 배움을 갖게 됩니다. 이러한 세미나를 온 가족들이 함께 했으면 하는 바람도 커집니다. 지난 가정 세미나에서 우리가 배운 한 가지는 우리의 잘못된 개념을 깨는 것이었습니다. 성격차이가 가정의 불화를 만들어내는 가장 큰 요인으로 알려져 있는데 사람들은 성격차는 극복할 수 없다고 ‘확신’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격차이는 너무나 당연한 것입니다. 사실 나도 내 성격이 맘에 들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성장 배경이 확연히 다른 부부가 성격이 같기를 바라는 것은 어불성설입니다. 결혼 전에는 그 차이를 알았음에도 크게 문제가 되지 않았던 것은 그 다름(차이)를 보듬을 수 있는 힘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살면서 그 힘을 잃어버리고 포기해 버린 탓이 원인입니다. 때로 우리는 절대적 절망이나 실망앞에서 포기하는 것을 반복해 왔습니다. 내 노력이 컸음에도 불구하고, 상대방이 반응이 없을 때, 기대에 어긋날 때, 실망이 클 때에는 정말 포기하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더 이상 기대를 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소 닭보듯’ 그렇게 관계를 유지하는 사람이 참으로 많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을 이해해 보면, 그 속 사정이 무엇인지를 알지 못하지만 어느 시점에 왜 그렇게 되었는지를 이해하게 되면 어느날 그 포기를 포기하게 되는 기적과 같은 일들이 일어납니다. 사실 그러지 않나요? 우리가 하나님을 얼마나 실망시키던가요. 요즘 새벽 기도회에 출애굽기를 다루고 있습니다. 시도 때도 없이, 원망할 조건과 환경이 되면 언제라도 뒤돌아서서 돌을 던지는 것이 이스라엘 백성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반역하는 그들을 진멸하지 않으십니다. 본보기를 보이실 때도 있지만 그렇게 해놓고도 하나님은 다시 찾아와서 관계를 회복하자고 말씀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그것을 보고 우리는 ‘포기하지 않는 사랑’이라고 부릅니다. 우리는 주님을 늘 배반하지만, 그러한 우리를 주님은 포기하지 않는 사랑으로 다시 찾아오십니다. 이미 끝나도 진즉 끝날 관계입니다만 끝내지 않으셨습니다. 나같은 사람도 끝까지 포기하지 않으시고 붙잡아주셨습니다. 그 사랑이 우리가 천국 가도록 우리에게 향할 것입니다. 우리 공동체의 인간관계도 그렇습니다. 도무지 바뀔 수 없다고 포기한 사람, 아무리 뭐라해도 듣지 않는 사람, 늘 마이웨이의 삶을 사는 사람, 고집불통이라고 내 놓은 사람, 구제 불능이라고 내 놓은 사람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참아낸다는 것은 자존심도 상하고, 속도 상하고, 분노조절 장애처럼 올라올 때도 있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면 될까요? 법대로 하면 다 잘라내야 할 것입니다. 한 손이 범죄하면 잘라버리라, 두 손 성하고 지옥가는 것보다 낫다고 하시는 말씀이 훨씬 가슴에 더 다가설 수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가지는 포기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포기하지 않는 태도, 그것이 사랑이든 인내이든, 명령이든 포기하지 않겠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특별히 영혼구원에서는 더더욱 그렇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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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66
    아름다운교회 May 09.2021 어머니, 그 아름다운 이름
    백신 접종이 어느 정도 원활해 지면서 눈물겨운 상봉이 이루어지고 있다는 소식을 듣습니다. 양로원에 계시는 부모님을 코로나 때문에 보지도 못하던 안타까운 가정이 가슴을 아프게 했는데, 이제 백신접종으로 인해 드디어 만나보게 되었다고 눈물겨운 상봉을 하게 된 가정들의 기뻐하는 모습을 보면서 참 감사했습니다. 아버지, 어머니라는 이름은 세상에서 가장 포근한 이름입니다. 불러도 지침이 없고 다 써도 마름이 없는 이름입니다. 오늘이 ‘어머니 날’입니다. 교회력으로는 ‘어버이(아버지. 어머니) 주일’입니다. 우리 교회도 부모님의 은혜를 생각하며 그분들에게 작은 선물을 드리기 위해 여러 사람들이 힘을 합했습니다. 모처럼 많은 사람들이 나와서 나름대로 할 수 있는 모든 정성을 다해 김장도 하고, 내일 음식을 준비하고, 오랜만에 아무런 거리낌 없이 마스크를 벗고 하하 호호 웃으면서 즐거이 봉사하는 모습을 바라보면서 흐믓한 마음을 한껏 누렸습니다. 코로나 때문에 닫혔던 문들이 열리는 듯하여 마음이 환하게 밝아오는 것을 느꼈습니다. 부모님을 생각하는 모두의 사랑과 정성이었습니다. 부모공경은 하나님의 명령이며 우리가 복을 받는 길임을 분명히 명시하고 있습니다. 십계명으로도 선명하게 밝힌 부모공경, 누군가에게는 마땅히 해야할 본분이며 사명이기에 이를 위해 생명을 다하여 그 길을 걷는 이가 있는 반면에 부모로부터 받은 상처로 인하여 쉽지가 않은 사람들도 있고, 자기 이기앞에서기만 하면 한치의 양보도 없는 삶을 사는 사람들이 서로 공존하는 곳이 우리가 사는 세상입니다. 부모자식간의 소통과 관계가 원활하지 않는 가정은 무엇인지 모르게 불행한 냄새가 납니다. 어디가 삐걱거려도 삐걱거립니다. 하지만 부모공경이 원활한 가정은 늘 행복의 향기가 가득하게 퍼져있습니다. 제가 배우자를 선택하는 두 가지 조건이 있었는데, 그것은 ‘신앙과 효도’였습니다. 효도를 배운 가정, 효를 마음에 둔 사람의 심성이 절대로 악할 수 없다는 것을 어려서부터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인지 아내는 잘 얻은 것 같습니다. 분명히 ‘효도’가 쉽지 않은 사람이 있습니다. 하지만 반드시 해결해야 할 숙제입니다. 그것이 하나님과의 관계이기 때문입니다. 어느 방송에서 부모님들을 인터뷰하였는데 자신의 자녀들을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어보았습니다. 아쉽고 서운한 것이 분명히 있었을 것이고, 마음에 들지 않고 화가 나는 일들도 많았을 법한데, 그래서 그 서운함을 토로할만도 한데도 어느 부모도 그렇게 하지 않고 한결같은 말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미안함’이었습니다. 더 잘해주지 못해서, 더 도와주지 못해서 못내 아쉬워하는 마음이 한 가득이었습니다. 그런데 자녀들은 어떻게 생각할까요? 더 안준다고, 더 못해준다고 아우성을 치는 젊은 자녀들을 볼 때마다, 마치 부모에게 빚받아내려는 듯 부모를 대하는 자녀들을 볼 때마다 가슴을 쓸어내립니다. 나이가 들어도 여전히 부모에게 손벌리며 사는 자녀들을 볼 때도 안타까움이 많습니다. 부모님, 우리에게 생명을 주셨다는 한 가지 사실 만으로도 이미 충분한 사랑을 주었고, 우리를 길러주신 사랑만으로도 이미 충분한 힘을 공급해 주셨습니다. 아무 보상도 바라지 않으시고, 오직 양육의 책임을 평생을 져 오셨습니다. 어떻게 감사해야 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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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65
    아름다운교회 May 02.2021 Communication error
    어느 새 5월이 되었습니다. 꽃피는 춘삼월이 언제 왔나싶은데, 벌써 여름은 가까이서 손짓을 합니다. 시간앞에만 서면 언제나 겸손해질 수 밖에 없는 것이 우리임을 알게 됩니다. 이 5월에는 우리가 그동안 한번도 해 보지 않은 ‘가정 세미나’를 가지려고 합니다. 왜 진즉 이러한 모임을 하지 않았나 싶은데, 그 이면에는 제 자신 속에 있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저 스스로가 좋은 남편, 좋은 아들, 좋은 아빠라는 ‘자신감’이 없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여전히 그런 자신감은 없지만 자그마하게 깨달은 것들이 있고, 필요성을 깨닫기 때문에 용기를 내게 됩니다. 아마도 많은 분들이 이런 생각을 하는 것 같습니다. ‘나는 이런 세미나를 안해도 충분히 행복하고 만족하고 있다’는 사람이라면 그 가정은 참 좋은, 행복한 가정들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그런데 그렇지 않다면 어떤 모습일까요? 체면 때문에 그저 남들에게 웃는 모습, 좋은 모습만 보여주고 싶은 심정일까요? 그래서 속을 남에게 내려놓고 싶지 않은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니면 아마도 무슨 일을 해도 행복할 수 없다는 ‘확신(?)’ 때문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래서 나의 잘못된 모습이 드러나면 괜히 창피스러운 것이 아닌가 하는 막연한 두려움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아무튼 가정은 저절로 행복하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왜냐면 우리 모두에게는 교묘하게도 ‘커뮤니케이션 에러!’를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제가 누리는 ‘소확행(소소하지만 확실한 행복)’ 중의 하나가 McDonald에서 65센트짜리 senior coffee를 먹을 때입니다. 우선 좋은 것은 가격이 저렴하고 맛도 나쁘지 않다는 것, 그리고 그 1불도 안되는 돈으로 아무 때나 부담없이 먹을 수 있다는 만족감 때문이지 않나 싶습니다. 어느 날, 그 senior coffee를 주문하는데 평상시 같지 않게 cream & sugar를 처음으로 order에 삽입을 했습니다. 그런데 막상 받아보니 그것이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야기했습니다. cream & sugar는 어디있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달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 아가씨가 물끄러미 한 참을 바라보다가 작은 bag에 cream & sugar를 한보따리 넣어줍니다. 순간 살짝 불쾌감이 들었습니다. 나를 무시하는거야? 그런 마음으로 받아들고 오는데 커피를 마시려고 뚜껑을 여는 순간 아, 그 커피에 이미 크림과 설탕이 들어있었던 것입니다. 아마 그랬을 것입니다. 그 아가씨는 ‘거기에 다 있는데 왜 또 설탕을 달라고해? 손님이라고 갑질하는거야?’ 반대로 나는 그런 주문을 처음해봐서 이미 들어있는 줄도 모르고 그 아가씨의 행동이 무례한 것으로 느꼈을 것입니다. Communication error(잘못된 소통)에서 오는 오해이지요. 서로가 가진 전제가 각각 달랐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서로가 이미 알았더라면 좀더 유쾌한 거래가 되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을 몰랐기 때문에 서로의 입장에서 가진 서운함이 있을 법했을 것입니다. 바로 그것과 같습니다. 그러한 오해와 이해부족으로 인해서 생기는 불편함이 가정의 불화와 불편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온 가족이 다 그렇게 지냅니다. 남편이니까, 아내이니까, 자식이니까, 부모이니까 당연히 이래야지 하는 마음이 오해를 불러일으킵니다. 나에게는 당연한 것이지만 남에게는 그렇지 않습니다. 이러한 오류를 줄이기 위해서도 서로를 알아가는 과정이 필요합니다. 서로를 알수록 에러를 줄일 수 있습니다. 그것이 지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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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름다운교회 Apr 25.2021 사랑에는 두려움이 없나니...
    어느 딸이 엄마의 사랑에 대한 고마움을 이렇게 표현했다고 합니다. “엄마, 만일 다음 생이 있다면 그때엔 엄마가 내 딸로 태어나주세요. 그러면 제가 엄마에게 받은 사랑보다 더 큰 사랑을 줄게요” 윤회설을 떠나서 딸이 엄마의 사랑을 이렇게 갚겠다고 하는 그 마음이 정말 귀하고 아름다웠습니다. 그만큼 엄마의 사랑을 깊게 깨달았던 것이지요. 그랬을 것입니다. 엄마는 자식을 위해 목숨까지 주고 싶은 사랑을 했을 것입니다. 자식을 죽음에 내모는 비정한 엄마도 있다고 가끔 회자되기도 하지만 그런 사람보다는 한없는 사랑을 퍼 부은 엄마가 절대적으로 많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부모가 그런 사랑을 퍼부을 수 있는 것은 사랑은 두려움을 내어쫓는다는 성경의 가르침일 것이고, 그것은 인간의 심성에 깊이 잘 박혀있는 사랑의 모체이기도 합니다. 오늘 우리는 지금까지 인류역사 가운데 가장 ‘진보한 세상’을 살고 있습니다. 그것은 과학, 경제, 정치, 사상, 종교, 교육, 군사등 모든 분야에 있어서도 같은 위치에 있습니다. 이보다 진보한 세상은 없습니다. 퇴보라고 할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변질이라고 저는 보고 싶습니다. 그런 분야는 있겠지만 지금까지 이런 세상은 없었습니다. 시공간(時空間)적으로도 그렇지만 사상의 발전이라는 점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야말로 한번도 경험하지 못한 세상을 살고 있으면서 초조하기도 하고 두렵기도 한 세상을 우리가 살고 있습니다. 이것은 코로나 팬데믹을 지나면서 더 까칠해졌고 더 선명해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미래학자는 아니지만 목회자로서 자꾸만 제 마음에 밀려오는 생각이 있습니다. 그것은 어느 때보다 불투명하고 변질이 가능한 세상, 우리가 그야말로 상상도 할 수 없는 세상이 앞으로 다가올 것이라는 느낌은 지울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솔직히 우리들의 신앙생활이 앞으로 어떤 패턴으로 변하게 될지 생각해보면 두렵기가 한이 없습니다. 두 가지 현상이 선명하게 나타나게 될 것같습니다. Main stream은 세상이 끌고가는 방향입니다. 세상에 동조하고, 세상이 원하는 것들을 우리가 원하게 될 것이고, 그것이 인기를 끌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 방향을 ‘넓은 문’처럼 들어가게 될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그 와중에서 ‘흰 옷 입은 신부’처럼 ‘남은 그루터기’가 되어서 ‘좁은 문’을 지키는 극소수의 사람들이 있을 것입니다. 이런 경향을 생각해 보면 정말 앞으로 오는 세상이 두렵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이럴 때 어떻게 하면 남은 그루터기처럼 가지는 꺽이고, 잎은 떨어져나가서 그야말로 겨우 밑둥만 남은 세상을 살아갈 수 있을까를 생각해 보니 그것은 하나밖에 없다는 절규가까운 신음이 나옵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앞으로 어떠한 세상이 우리 앞에 놓여 있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는 모든 것이 가능하게 될 것입니다. 백신이 대다수의 사람들에게 공급될지라도 그 안에 여전히 두려움을 가진 사람들이 있을 것입니다. 이제는 ‘코로나 핑계’를 댈 수도 없습니다. 내 안에 있는 두려움을 ‘하나님/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사랑’으로 이기지 못하면 우리는 두려움의 종노릇을 하는 노예에 불과하게 될 것입니다. 어떤 세상이 오든, 우리는 우리 안에 갖가지 종류의 두려움을 주는 세상의 간계를 파악하고 그 두려움을 이겨야 합니다. 사랑이 그것을 이기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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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름다운교회 Apr 18.2021 벼락 부자, 벼락 거지, 개근 거지
    낙뢰(落雷)를 벼락이라고 합니다. 벼락은 번개와 천둥을 동반한 급격한 방전현상을 말하지요. 벼락맞았다. 그럽니다. 급작스러움을 표현할 때 쓰는 말이기도 합니다. 이런 벼락맞은 사람들이 많다고 합니다. 한국이야기입니다. 얼마전에 한국의 어느 지인과 통화를 했습니다. 요즘 부동산이 갑자가 올라서 자기 사는 집이 갑자기 ‘따따블’이 되었다고 합니다. 제가 그랬습니다. ‘부자되셨네요? 축하합니다’ 그랬더니 하시는 말, ‘저는 좋은데 제 딸이 울상입니다. 우리 딸이 졸지에 거지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축하해야 할지, 울어야 할지 잠시 혼돈이 왔습니다. 이런 현상을 한국에서는 ‘벼락 부자, 벼락 거지’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이러한 신조어를 듣다가 보면, 이런 용어들이 사실은 좋은 용어가 아닙니다. 자조섞이거나 비하, 비판의 어조가 더 담겨져 있기 때문입니다. 흥미로운 것은 그러한 류의 신조어중에 ‘개근 거지’도 있다고 합니다. 우리 학교 다닐 때에는 개근상도 줄정도로 개근이 큰 상입니다. 우등상은 못받아도 개근상은 타야합니다. 상(償)이니까요. 그런데 요즘은 이런 개근은 ‘거지’같은 삶이라는 비하용어라고 합니다. 왜냐면 일년 열 두달 결석하지 않고 열심히 학교를 출석했다는 말은 성실하다는 의미가 아니라 남들은 해외여행이다, 현장실습이다 해서 일년에 몇 번씩 번지르하게 해외를 오가는데 오죽 가난하면 체험학습도 못가서 학교에만 하루도 거르지않을 정도로 ‘가난한 학생’이라는 의미가 붙어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울어야 할까요, 웃어야 할까요? 정말 모르겠습니다. 이런 경우를 성경은 뭐라고 할까요? 비근할지는 모르겠지만 이런 것이 아닐까요? ‘나중된 자가 먼저되고, 먼저 된 자가 나중된다’ 뭐, 이런 류가 아닐까 비슷하게 껴맞추어 보았습니다. ‘벼락 구원’을 받은 사람은 벼락 부자라고 할 수 있을까요? 예수님의 십자가에 같이 달렸던 한 강도가 그런 사람이 아닐까 싶습니다. 날벼락 맞은 사람처럼 그렇게 구원의 은총을 벼락같이 받은 사람은 그나마 나은 것이겠지요.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가는 것이 아니다’라고 하는 말씀을 보면, 열심히 믿고 있고, 열심히 신앙생활하고 예수님 따라다닌다고 해도 갑자기 버린 받은 ‘가룟유다’와 같은 사람, 바리새인 같은 신앙인이 그런 사람들이 아닐까요? 두렵기도 합니다. 어쩌다가 부자가 되고, 어쩌다가 거지가 되는 세상이 공정한 세상이라고 이야기 할 수 없을 것이겠지요. 그런데 세상은 그러한 일이 비일비재합니다. 모두가 공감하고, 공평한 공정은 이 세상에서는 어차피 완벽할 수 없습니다. 왜냐면 인간의 공정은 상대적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예수님이 필요합니다. 그분은 우리의 공정/공평과는 거리가 멉니다. 우리의 공평은 상대적이지만, 그분의 공평은 절대적입니다. 하나님의 공평, 하나님의 공의이기 때문입니다. 요즈음의 세상은 자그마한 불편함과 손해에도 민감하다고 합니다. 너그러움이 사라지고, 오직 자기 중심의 시대를 살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세상에서 ‘공의와 공평’은 언제나 자기 중심일 수 밖에 없습니다. 주님의 공평이 기대가 됩니다. 주님이 오셔서 우리의 병든 마음과 사회가 속히 치유되기를 원합니다. 벼락 부자/거지, 개근거지의 정의가 아닌 완벽한 하나님의 공의아래 살기를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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